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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라빈스키 - 네이버캐스트

띨빡이 2011. 7. 20. 02:20

“므라빈스키 지휘로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은 마치 야생의 종마 같았다.

오직 주인의 의지에만 칼 같이 복종하는 종마들이었다.

매 순간 사나운 자긍심이 번득이고, 격앙된 채 질주하는 이들의 연주를 들으며

내가 지금 기분 좋은 자극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놀라 무서운 것인지 도통 알 수 없게 됐다.”

- 데이비드 패닝, 음악평론가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오늘날까지 러시아를 대표하는 지휘자 한 명을 꼽는다면

바로 그의 이름을 대게 될 것이다.

예프게니 알렉산드로비치 므라빈스키는 1903년 6월 4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18년 아버지를 여읜 므라빈스키는 마린스키 극장의 백스테이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지만

그 뒤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음악을 시작했을 때 작곡가를 지망해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작품도 썼지만,

지휘자가 된 이후 더 이상 작곡에는 힘을 쏟지 않았다.

므라빈스키는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작곡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회의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

 

 

 

50년간 레닌그라드 필에 군림한 러시아 최고의 지휘자


1923년부터 1931년까지 발레 음악 코치로 일한 므라빈스키는 1929년에는 청중 앞에서 처음 지휘를 경험했으며,

1931년에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처음 지휘했다.

1930년대에는 키로프 발레와 볼쇼이 오페라를 지휘했다.

1938년 9월 그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당시 심사위원은 “최고의 천재 중 하나”라고 그를 추켜세웠다.

1938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음악감독으로 임명된 므라빈스키는 1988년까지 무려 50년간 이 포디움에 군림한다.

므라빈스키의 지휘봉 아래 레닌그라드 필은 가히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러시아 대륙의 차가운 폭풍을 연상시키는 관현악의 포효와

바늘과도 같은 디테일이 연상되는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 같은 러시아 음악 해석은 대단했다.

 

프라하 뮤직 페스티벌에 참석한 지휘자 므라빈스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리니스트 오이스트라흐 (왼쪽부터).

 

 

1938년 므라빈스키는 레닌그라드 필 상임 지휘자에 취임하자마자 사기가 침체돼 있던 오케스트라의 재건에 착수했다.

투명한 음색과 응집력, 미묘하고 섬세한 뉘앙스와 중후하고 웅장한 클라이맥스를 겸비한

세련되고 고고한 연주는 취임 초기 녹음에도 나타난다.

취임 당시 레닌그라드 필의 기본이 되는 연주양식은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기간, 1941년 독소 전쟁 이후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은

시베리아 노보시비르스크로 피신해 있었다.

이 기간에도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은 위문연주를 포함한

엄청난 횟수의 연주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2군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레닌그라드 방송관현악단 단원들은 포위된 레닌그라드에 남아있었다.

러시아 지휘자 카를 엘리아스베르크는 남아있는 음악가들을 모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초연했다.

 

 

 

쇼스타코비치와 차이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는 므라빈스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요 레퍼토리였다.

1937년 므라빈스키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초연했을 때,

곡이 끝나고 박수가 성급히 터져 나왔다. 므라빈스키는 악보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흔들었다고 한다.

므라빈스키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5곡 가운데 6곡을 세계 초연했다.

5번, 6번, 8번(쇼스타코비치가 므라빈스키에게 헌정), 9번, 10번, 12번이 그것이다.

제2차 대전 중 쇼스타코비치가 비통한 운명을 그린 [교향곡 8번]이

당국의 악평을 사고 궁지에 빠졌을 때([교향곡 8번]은 초연 후 1960년까지 무려 17년간 연주가 금지됐다),

[교향곡 5번]을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도입한 므라빈스키가 쇼스타코비치의 입장을 지지했다는 일화도 있다.

므라빈스키가 평생 동안 두 번째로 연주 횟수가 많았던 것은 [교향곡 5번]이었다.


므라빈스키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집을 남기지 않았고 교향곡 5.6.7.8.10.11.12.15번 녹음이 남아있다.

모두 명연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이 라이브 녹음이다.

교향곡 이외에도,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오이스트라흐와 [첼로 협주곡 1번]을 로스트로포비치와 공연하고 초연하고,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도 초연하고 녹음도 남기고 있다.

1962년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교향곡 13번]도 므라빈스키가 초연하길 바랐으나 므라빈스키는 거절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금이 갔다. 초연을 거절한 이유로는 정치성이 강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그러나 그 후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되어 세계 초연(막심 쇼스타코비치 지휘)은 아니었지만,

[교향곡 15번]은 므라빈스키가 레닌그라드에서 초연하고 자주 연주했다.   

 

므라빈스키에게 쇼스타코비치 다음으로 중요한 레퍼토리는

차이코프스키였다. 1960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한

교향곡 4, 5, 6번은 므라빈스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명반이다.

이 기록 이외에도 이 후기 3대 교향곡은 연주 빈도가 높고,

수많은 명반이 남아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은

므라빈스키가 일생 동안 가장 많이 연주한 곡이며,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므라빈스키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작품 중에는 그 외에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와

[호두까기 인형], [이탈리아 기상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현악 세레나데] 등도 남아있다.

또한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를 비롯한

협연자와 녹음이 몇 가지 남아있다.

 

쇼스타코비치, 차이코프스키 이외 러시아 레퍼토리로는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이 유명하다.

역대 초고속 템포의 정밀하고도 다이내믹한 명연이다.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6번]을

1947년 레닌그라드에서 초연하고 정기적으로 연주했으며,

[로미오와 줄리엣] 녹음도 남기고 있다.

또한 하차투리안 [교향곡 3번]을 초연 녹음했다.


므라빈스키의 손꼽히는 명반 중 하나인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음반.

<출처: 유니버셜 뮤직>

 

어린 시절 친분이 있던 글라주노프의 [교향곡 5번]과

모음곡 [라이몬다] 등의 작품과 스크랴빈의 [교향곡 4번 ‘법열의 시’],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 [뮤즈의 신을 이끄는 아폴로],

무소르그스키의 [호반시치나]나 리야도프의 [바바야가]등의 작품도 연주하는 등

동시대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 해석에도 적극적이었다. 

러시아 외 작곡가로는 베토벤과 모차르트, 브람스, 바그너, 브루크너 같은 독일-오스트리아 작곡가들도

비교적 즐겨 다루고 시벨리우스나 힌데미트 등도 연주하는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므라빈스키는 1938년부터 1961년까지 스튜디오 레코딩을 남겼다.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의 전성기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1961년 이후 레코딩은

모두 제한된 횟수의 콘서트 실황으로 만든 것이다.

므라빈스키 최후의 레코딩은 1984년 4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2번] 실황이었다.

이후 므라빈스키는 본인의 모든 녹음을 거부했다.

 

 

 

전설로 회자되는 해외 연주여행 녹음


첼리비다케만큼은 아니었지만 므라빈스키는 레코딩을 싫어했다.

아예 마이크의 존재와 녹음 작업 자체를 싫어하고 연주 전에는 "마이크를 모두 철거하라"고 요구하고,

녹음 후에는 "녹음한 내용을 모두 삭제하라"고 하며 관계자를 괴롭혔다.

녹음 예정이 없는 비교적 만족스런 연주 후에는 능청스럽게

"어때요, 오늘 녹음은 잘 됐나요?“(녹음했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하고 물어 보곤 했다 한다.

므라빈스키는 1946년에 첫 세계 투어를 가졌다.

당시 그가 레닌그라드 필과 방문한 나라 가운데는 핀란드와 체코 슬로바키아(프라하의 봄 페스티벌)가 있었다.

프라하의 봄 페스티벌에서는 체코 필하모닉을 지휘했는데,

이로써 체코 필은 므라빈스키가 평생동안 러시아 오케스트라 이외에 지휘한 유일한 오케스트라가 됐다.

상임 지휘자 재임중 므라빈스키가 레닌그라드 필 이외의 오케스트라를 객원지휘하는 경우는

체코 필 외에 드물게 소비에트 국립 교향악단(현 러시아 국립 교향악단)을 지휘한 것 말고는 없었다.


그 뒤 1956년 6월에는 서독, 동독,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여정으로 투어를 가졌다.

그 가운데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을 맞아 빈을 방문한 것은

므라빈스키의 명성이 서방에까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약 25년에 걸쳐 외국 공연을 하게 됐는데,

1960년에 에든버러 페스티벌과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공연한 것은 이들의 유일한 영국 투어였다.

이때 녹음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그리고 오스트리아 빈 악우협회홀에서 녹음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과 [6번 ‘비창’](DG)은

지금도 동곡 최고의 명연에서 내려올 줄 모른다.

당시 포디움에서의 위엄있는 풍모와 탁월한 지휘,

큰 키로 인해 므라빈스키에겐 ‘러시안 클렘페러’라는 별명이 붙었다.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은 1946년과 1957년 미국 공연을 가졌지만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다.

총 네 차례 가졌던 일본 공연은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그중 최초 방문은 1973년이었으며, 1984년의 서독 투어는 이들의 마지막 해외 연주여행으로 기록됐다.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의 라스트 콘서트는 1987년 3월 6일 공연이다.

이날 므라빈스키는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과 브람스 [교향곡 4번]을 연주했다.

그 1년 뒤인 1988년 그는 레닌그라드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84세였다.

 

 

 

엄격한 리허설  & 므라빈스키의 인간적 면모


음반을 들어보면 므라빈스키가 오케스트라 전체를 기술적으로 탁월하게 제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다이내믹에 대한 조절 면에서 그러한 점이 뚜렷하다.

므라빈스키는 활기차고 자극적인 지휘자였다.

음악적 효과를 위해 템포를 자주 바꾸고 연주시 관악군을 두드러지게 썼다.

베토벤 [교향곡 7번] 1악장을 느리게 연주한다든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의 피날레에서 급가속을 하는 경우가 그 예다.

 

므라빈스키는 매서운 눈빛에 수수한 차림으로 포디움에 나타났다.

지휘 동작은 간단하고 매우 명료했다.

이따금 맨손으로도 지휘했다. 훤칠한 장신에 어려운 악곡을 명쾌하게 해석하며

청중을 몰입시키는 카리스마가 그에겐 있었다.

지휘 기술은 매우 뛰어나 말년에는 지휘봉 없이 손의 섬세한 움직임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오케스트라를 제어했다.

50년 동안 므라빈스키가 다져온 레닌그라드 필의 앙상블은

토스카니니를 연상시킬 정도로 정확한 스코어 해석과 템포 설정으로

악보 그 자체보다도 한차원 높게 표현된다.

 

오케스트라의 텍스처는 명료하기 이를 데 없다.

촛불이 흔들리는 듯 가녀린 피아니시모에서

천둥소리와 같은 포르티시모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지휘 활동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약 50년 동안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를 맡아

국가가 볼 때도 중요한 포스트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평생 구소련 지도부에 대해

강한 의심과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결국

소련 공산당원이 되기를 거부했다.

소련 당국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에 대한 탄핵 결의문을

소비에트 러시아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게 요구했을 때

당국의 강경 자세에 쇼스타코비치 등은 못 견디고 서명했지만,

므라빈스키는

 “솔제니친의 책은 러시아 내에서 발매 금지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읽을 수 없다”는 이유로 서명하지 않았다.

외국 악기 구입과 관련해서도

“왜 러시아제 악기를 사지 않는가?”라고 묻는 당국자에게

“좋은 음악을 연주하려면 외국산을 사지 않으면 안된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소련 정부도 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므라빈스키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교향곡 8번]은 쇼스타코비치가 므라빈스키에게 헌정한 작품으로,

당국의 비판을 사기도 했다. <출처: 유니버셜 뮤직>

 

므라빈스키의 독재적인 리허설은 전설로 회자된다.

철저하고 엄격하며 타협이 없는 완벽주의를 관철하고야 마는 리허설이었다.

레닌그라드 필에 부임한 이후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도 이같은 리허설은 계속 됐다.

므라빈스키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각 악기 하나하나의 연습으로, 레닌그라드 필 취임 후에 시작되었다.

이는 악단원들의 맹렬한 반발을 샀지만,

므라빈스키는 결코 타협하지 않고 항상 연습에 얼굴을 내밀고

멤버들을 독려해 점차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향상시켜 갔다.


BBC방송의 특집 프로그램 가운데 레닌그라드 필의 바이올리니스트 단원이

므라빈스키의 평소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를 이야기하는 부분이 나온다.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리허설할 때의 이야기다.

“므라빈스키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완벽하다고 생각해도 만족하지 않고,

집에서 스코어 연구를 다 해와 단원들에게 빼곡히 적힌 악보를 나눠주었다.

이 악보를 보며 리허설은 몇 번이고 반복되며 므라빈스키의 세세한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데

체력적으로도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 날은 잊을 수 없는 하루였다.

마지막 리허설을 할 때 너무나 완벽해서 믿을 수 없이 연주가 잘 되고,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마치 세상의 것이 아닌 음악에 휩싸인 것 같았다.

그런데 믿을 수 없었던 건 므라빈스키가 연주회를 취소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유가 기가 막혔다.

‘이런 연주는 다시 없을 거라고 느꼈고 리허설만큼 실제 연주가 될 리 없다’는 므라빈스키의 직감 때문이었다.”

이렇게 리허설이 엄격한 데다가 연주 빈도도 많았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때는 적어도 10번 이상 전곡을 연주했다.

일본 공연때 리허설을 참관한 관계자는

‘이미 능숙한 오케스트라를 저렇게 리허설을 시키다니’ 하며 놀랐다고 한다.

부임 이후 므라빈스키의 이러한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명성과는 다르게 므라빈스키의 사생활은 매우 검소했다고 전해진다.

마에스트로는 자연과 문학과 예술을 사랑해 숲을 산책하거나 낚시와 물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언제나 시를 읽기를 좋아하고 주위 사람을 매료시키는 유머 감각의 소유자였다.

모든 동물을 사랑해 집안에 벌레가 있어도 죽이지 않고 밖으로 내보내는 정도였다고 한다.

“므라빈스키는 분명 애정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걸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죠.”

레닌그라드 필의 부지휘자였고 므라빈스키의 오랜 동료였던 쿠르트 잔데를링의 말이다 역시

BBC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한 레닌그라드 필의 단원 출신 여성 연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므라빈스키는 연주가로서의 제 삶에 큰 영향을 준 사람입니다.

처음 레닌그라드 필에 입단한 시점에서는 단지 다른 사람보다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는 단순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므라빈스키의 지휘 아래 연주하면서 처음으로 진짜 음악가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약력
1924레닌그라드 음악원에 들어가 작곡과 지휘를 배운다
1931-1938 마린스키 극장에서 지휘자 데뷔 이후 활동
1934 정기적으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객원 지휘.
1937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초연.
1938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로 취임. 이후 50년간 군림
1946 스탈린상 수상
1954 인민 예술가 칭호 수여
1961 레닌 상 수상. 뒤에 레닌 훈장도 수상.
1988 레닌그라드에서 사망.

 

 

 

 

 

류태형 /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 전 '객석' 편집장, 음악 칼럼니스트
 
2011년 새해부터 주말저녁 6시~9시30분까지 KBS 클래식FM의
'FM음반가이드' 를 진행하며 청취자들과 만남을 갖고 있다.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누비길 즐겨 하는데,
요즘은 거기에 따끈따끈한 새 음반이 가세해 삼각지대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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