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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신문수-네이버캐스트

띨빡이 2009. 8. 26. 13:21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명랑만화라는 장르명이 익숙하게 들린다면 나이가 아주 어리진 않을 것이다. 명랑만화는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함’ 또는 ‘유쾌하고 활발함’이란 뜻을 지닌 명랑(明朗)을 붙인 장르명으로 ‘순정만화’처럼 우리나라에서 나온 표현이다. 명랑만화는 대체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며 단순화한 선과 과장된 등장인물들의 움직임, 효과음이 경쾌한 느낌을 준다. 1960년대 중반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등장했던 다양한 아동 잡지들을 기반으로 뿌리를 내렸던 이 장르의 대표 작가로 <꺼벙이>의 길창덕 선생과 <맹꽁이 서당>의 윤승운 선생, 그리고 바로 이번에 만난 <로봇 찌빠>의 신문수 선생을 들 수 있다. 이제는 장년층이 된 이들 가운데 이들의 만화와 어린 시절을 보낸 추억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가운데 신문수 선생의 <로봇 찌빠>는 최근 애니메이션화를 비롯해 후배들의 손으로 웹툰으로 리메이크되는 등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캐릭터로서도 단일 작품으로서도 독자들의 뇌리에 유난히 깊게 남아 있다. 그 뿐이랴, 얼마 전엔 인기 온라인 대전액션 게임 <던전앤파이터> 광고 만화에 찌빠가 등장해 올드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한 작품의 캐릭터가 등장한지 35년이 지나서도 대중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만화를 시작하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신문수 선생도 소싯적엔 시절 공부시간에 공책에다 만화 좀 그리던 ‘그림 좀 그리는 학생’이었다. 동양화를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던 중학 시절, 초가집을 전문으로 그리던 유천 김화경 선생(1922~1979)에게 동양화를 배우며 홍대 주최의 전국대회도 나가 특선 입상하는 등 성과를 올렸지만, 막상 고향인 천안을 떠나 서울 쪽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미술 선생이 서양화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1학년까지 천안을 오가며 배우다 2~3학년 동안엔 그림을 안 그렸다. 그 시절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터라 대학에 가지 못한 신문수는 조종사가 되겠다고 공군사관학교에 갔지만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고향으로 내려가 6개월 가량을 쉰다. 하지만 얼른 군대부터 다녀와야겠다고 공군에 자원입대, 3년 후 제대하고 다시 고향에 온다. 이때 진로를 고민하다 생각한 것이 그림을 잘 그리니 만화를 해보자는 것. 문제는 이 당시에 만화를 어떻게 그린다 하는 지침서도 없었고 그리는 방법도 몰라 혼자 집에서 습작을 통해 독학을 했다. 투고용 원고를 한 페이지를 할 때 다 그리다가 끝부분 틀리면 수정액으로 지우면 될 것을 수정액 쓸 줄 몰라서 처음부터 모두 다시 그리는 식이었던 것.

 

그렇게 제대 후 6~7개월 정도 혼자 습작을 하며 독학을 하던 것이 20대 초중반 무렵. 신문 독자만화란에 투고를 하던 것이 <고바우> 김성환 선생의 눈에 띄고, 이윽고 대중 오락잡지에 투고한 것이 당시 명랑만화의 최강자로 활동하던 길창덕 선생의 눈에 띄어 길창덕 선생의 신인만화가 추천으로 정식 만화가로 데뷔한다. 이때가 1964년이다. 당시 김성환 선생은 내용으로 볼 때 아동만화를 하면 비전이 있을 것 같다고 했으며, 길창덕 선생은 모처럼 괜찮은 명랑만화 작가가 하나 나타났다면서 잡지에 추천사를 써 주었다.

 

이 길창덕 선생을 중심으로 얽힌 인연이 묘하게 재미있다. 프로작가 데뷔에 큰 역할을 해 준 셈인데, 당시 길창덕 선생은 잡지만화만 했었는데 단행본을 그리면 인기가 좋을 거라 생각한 출판사들이 그를 섭외한다. 이때 신문수 선생은 이미 길창덕 선생과 먼저 알고 있던 윤승운 선생과 3각으로 얽혀 길창덕 선생의 후배이자 제자로 서로 교우를 쌓기 시작했고, 이 셋이 길창덕 선생에게 들어온 단행본 작업을 일손을 나눠 작업했다. 그런데 길창덕 선생이 당시 단행본 만화시장의 주축이었던 신촌 쪽 만화 출판사들과의 생리가 맞지 않아 오래 안 가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그만 두게 되었고, 이때 신문수 선생을 스카우트한 사람이 당시 단행본 계열의 최고 인기 작가이자 불세출의 아이디어 뱅크로 이름을 날렸던 고 김경언 선생이다. 고 김경언 선생은 한 달에 50~60권을 쏟아내는 다작에 아이디어를 쏟아내기로 유명했는데, ‘생각하는 장소’로 꼽는 화장실을 응접실 수준으로 꾸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신문수 선생은 고 김경언 선생의 문하에서 일을 돕다가, 평생 남의 일만 도울 순 없다는 생각과 대중만화 작가로 데뷔했다는 생각으로 중간에 그만두고 나오게 된다.

 

 

 

이 당시 젊은 만화가들을 중심으로 뭉친 만화가 모임이 바로 창작만화가회(창만회). 이후 낚시 모임이자 국내 최고(最古) 만화가 모임이 된 ‘심수회’의 전신이다. 야구모임을 빙자해(?) 만들어졌다는 창작만화가회엔 윤승운 씨도 있었는데, <따개비>의 오원석 선생과 <시인이로소이다>의 허어 선생이 합세해 종로5가에 조그마한 작업실을 내 공동작업을 했다고 한다. 1972년까지 약 5~6년 전문작가가 함께 활동하다 보니 일거리가 많이 늘었고, 이 시기 드디어 신문수 선생의 대표작인 <도깨비 감투>가 《어깨동무》에 60페이지짜리 단권 부록으로 실리기 시작하며 크게 흥행한다.

 

이 인기를 본 《소년중앙》의 의뢰로 연재를 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로봇 찌빠>. 이 작품 반응도 굉장히 좋았고, 당시 새로 생기기 시작하던 잡지들이 너도나도 의뢰를 해 오게 된다. 당시 《소년생활》 《소녀생활》 《보물섬》 등등 온 잡지들이 부록뿐 아니라 본지 연재만화로도 작품을 싣기 시작해 분량이 많아지게 된 것. 선생은 <도깨비 감투>와 <로봇 찌빠> 때도 혼자서 문하생 없이 두 부록 만화를 하기 위해 매일 밤을 새다시피 했었고, 급기야 새벽 2시에 끝나면 그 다음 것을 뒤져서 하기도 하면서, 저쪽 주인공이 이쪽에 있는 등 이름도 헷갈릴 지경이었다고. 이 때문에 선생은 훗날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그때 여러 군데 자리 잡으려다 보니 많이 한 것도 있었지만 조금 더 작품을 선택해서 조절해서 조금만 했었으면……. 다작을 하지 않았으면 그 당시 머리 팡팡 돌아갈 때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 거 같은데. 70년대 80년대 너무 많이 작품 연재를 많이 해서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한두 권 작품에 열중했으면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까 생각이 드는데.”

 

선생은 단행본 다작을 하는 후배 작가들에게 “극화체 만화가 손이 들긴 하지만, 그걸 넘어서 ‘닭장처럼 일사불란하게 공장처럼 차려놓고 하는’ 작업 방식이 당장 돈은 벌지 몰라도 작가 생명이 오래 못 간다”고 충고한다. 선생 자신도 한창 바쁠 때는 원고 갖다 주는 직원 하나는 있어도 실제로 자기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안 썼다고 한다. 이런 공장 시스템으로 돌아가던 당시, 신촌의 만화 출판사 쪽으로부터 윤승운 선생과 함께 이름만 빌려주면 책을 알아서 찍어내고 월 1천만씩 입금해 줄 테니 계약하자고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솔깃했던 건 사실이지만 안 하길 백 번 잘했다 생각한다고. “오랫동안 작가 생활을 하려면, 자기 작품을 자기가 관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은 ‘절친한 친구’를 그냥 ‘절친’이라고들 한다는데 아마 신문수 선생과 ‘절친’이라고 하면 인터뷰 내내 이름이 나온 윤승운 선생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화 이야기하면 윤승운 씨를 빼놓곤 이야기할 수 없어요”라고 할 정도면 말 다 한 셈. 함께 공동 작업실 꾸려 쓰던 당시 신문수 선생의 <도깨비 감투>가 인기가 있으니 연재지였던 《어깨동무》에서 윤승운 선생에게 다른 거 같이 해 보자고 제의해 <요철발명왕>이 같은 시기 함께 부록으로 제공되기 시작했다. “<도깨비 감투>가 인기가 있었는데 윤승운 씨 들어오니까 한 달은 <도깨비 감투>가 조금 더 엽서가 많이 들어오고 다음 달은 <요철발명왕>이 더 많이 들어왔어요. 근데 한 사무실이니까 마감도 똑같고. 시작도 같고. 그게 선의의 경쟁이랄까 어느 정도 서로 라이벌 의식도 있고 하니까. 나는 나중에 생각했는데 내 만화 발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윤승운 씨도 마찬가지고. 나로 인해서 더 분발하고.”

 

앞서도 언급한 부분이지만 윤승운 선생은 초기 길창덕 선생 일을 같이 돕기도 하고 대중잡지 연재를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 신문수 선생과 함께 해 온 사이다. 작업실을 함께 하다 보니 심지어는 서로 원고가 먼저 끝났어도 기다려주는 끈끈한 우정(?)을 발휘했다고.

 

“《보물섬》 《소년중앙》 원고를 하고 있으면 난 끝나도 저 사람은 아직 하고 있고. 마감날이면 그렇잖아요. 그럼 내가 먼저 끝나도 안 갖다 줬어요. 전화와도 안 끝났다 하고. 윤승운 씨도 자기가 다 끝나서 다 꾸려놨어도 내가 못 끝냈으면 오늘 다 못 그렸다 그래서 둘이 다 끝나야 갖다 줬거든. 나중에 둘이서 짜고선 원고 늦게 준다는 소리도 들었죠. 허허허.”

 

선생의 작업실 한 쪽 사진 속에 낚시대를 들고 서 있던 심수회 멤버들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원고하는 자세에서 많이 배웠다던 고 고우영 선생의 이야기도 무척이나 반갑다. “1983년에 역삼동에서 윤승운 씨랑 고우영 씨랑 셋이서 화실을 같이 썼었죠. 고우영 씨는 중국 고전이나 삼국지 초한지 수호지 다 외워서 종이만 있으면 될 거 같은데, 그렇지 않았어요. 그때 같이 작업 많이 가 봤거든. 고우영 이정문 윤승운 박수동 이렇게 해서 술 먹으러 가고는 싶은데, 일 되든 안 되든 싸들고 가자 해서 아침부터 6시까지는 반드시 일하고. 6시 딱 되면 ‘됐다 술 마시러 나가자~’ 하곤 했는데. 그렇게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거 옆에서 보면 고우영 씨는 같이 일하러 가도요, 책을 참고서적 가득히 한 배낭 메고 온다고. 다 볼 수도 없지만 그 사람 수호지 초한지 그릴 때 머리에 다 있지만 참고서적으로 이 책 저 책 다 보고 모든 자료를 종합해서 그리는 거지. 다 꿰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해. 옆에서 보면서 작품 하는 거 영향을 받았죠.”

 

 

 

신문수 선생은 스스로 “몸만 늙었지 철이 안 들었다, 정신연령은 손자랑 딱 맞는다”면서 너털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그 말 속에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선생은 언제나 눈높이를 아이들에게 맞춰 왔다. <로봇 찌빠>의 찌빠가 왜 로봇 주제에 완벽하지 않고 어딘가 엉성한 ‘고장난 미제 로봇’인가도 다분히 이러한 시점에 기인한다. “(명랑)만화 그리려면 아동심리를 파악해야 하거든. 음식점에 가서도 사장이 너무 근사하고 그러면 괜히 주눅 들고 그렇잖아요? 팔팔이보다 찌빠가 너무 완벽하고 그러면 팔팔이가 주눅들어서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 그에게 요즘 상황은 조금 우려스러운 듯하다. “애들이. 정말 공부에 애들이 너무 공부에 지쳤는데 만화 볼 때만큼은 만화에서 학습을 찾지 말고. 그냥 만화 보고 크게 웃고 신나게 재밌게 보고 덮고 공부하면 되는데. 요즘은 학습만화라 해서 학습하고 만화를 짬뽕해서, 부모들이 학습이라면 만화도 보고 공부도 된다고 하니까 사 주죠. 지금 시대 어린이들이 더 불행하다고. 어린이용 만화책 하나도 없습니다. 애들이 한다는 게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몰두해 있는데. 아이들이 NDS 한다 해서 막~ 해봐야 걔 머릿속에는 기계적 기술만 늘어나는 거지. 하늘을 쳐다보고 우주는 어떻게 생기고 무슨 생물이 있을까, 그만한 나이에는 상상력 사고력을 키워줘야 하는 거거든요. 사고력이 곧 창의력을 유발하는 거니까.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머릿속에 꿈도 많고 상상력도 많고 해야 하는데, 이게 너무 그냥 기계적으로 주입식으로 공부만 하고 말예요.”

 

어린이용, 특히 명랑만화의 역할은 바로 단순과 과장 속에 이러한 상상력의 세계를 담아 아이들로 하여금 사고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것. 그런 점에서 만화조차 학습효과에만 매달리려 들고 아이들에게 그런 쪽만 읽히려 드는 어른들의 생각도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선생은 이와 관련해 대기업들이 사회사업으로서 사명감을 지니고 어린이 교양잡지를 내 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학습만화나 고전작의 리메이크로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어린이용 만화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과연 다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고래가 그랬어》와 같은 잡지들이 시도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현 시대에선 쉽지 않아 보인다.


 

 

 

분당에 자리한 신문수 선생의 원룸 작업실에는 그 동안 작업해 온 손 원고들부터 선물 받은 그림, 작업물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최근엔 사보나 홍보물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얼마 전엔 ‘던파(게임 <던전앤파이터>)’ 광고 만화도 그리는 등 여전히 정열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재밌는 건 그 연세에 포토샵을 직접 다루며 CG로 채색을 하는 등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컴퓨터 작업엔 작업실이 바로 근처인 윤태호 작가에게 종종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바뀌어가는 환경과 경향에 관해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돌리기보다 생각을 달리 하기로 했다는 대목에선 탄복할 따름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오히려 쉽사리 못 품는 마음가짐이란 점에서 더욱이 그렇다. 생각해 보니 인터뷰 내내 신문수 선생은 윤승운 선생을 아이디어 뱅크로 칭찬했지만, 신문수 선생도 그 당시 인공지능 로봇이란 소재를 떡하니 등장시킬 만큼 앞서나가는 사람이었다. 물론 인터넷 덧글 같은 것을 보고선 무서웠다지만.

 

선생의 대표작인 <로봇 찌빠>는 리메이크 웹툰으로 또 애니메이션으로 다시금 새 독자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선생 스스로는 여태 가만히 있다가 놓쳤었다는 안타까움을 드러내지만 애니메이션의 경우 방송사의 제작비 지출이나 편성 등 고질적인 문제 앞에서 올해 말 편성 일정을 잡아냈다고 한다. 선생이 직접 돈을 더 보태기까지 했다니, 그야말로 잘 되어야 한다는 말이 남 말이 아니다.

 

고우영, 박수동, 윤승운을 비롯해 그 자체가 국내 만화계 역사라 할 수 있는 심수회 일원들을 모아 심수회 만화박물관을 세우고 싶다는 의중을 밝히는 신문수 선생. 선생 자신은 아이 같다면서 허허 웃지만 연세를 의식한 듯 늦기 전에 지금까지의 발자국들을 정리하길 원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치료를 끝낸지 7년이 넘었다지만 신장암에 걸린 적도 있는 만큼 앞으로도 건강을 챙겨 더욱 오래 작품들을 선보여주길 독자로서 바라마지 않는다. 아울러 고향땅인 충남 천안에 박물관을 꼭 세울 수 있기도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한 말씀. “나이가 있어서 작가 생활도 접어가는 상황이지만. 항상 고마운 건, 지금도 옛날 작품을 기억해서 어디 행사장이나 전시장 가서 로봇 찌빠, 도깨비 감투 팬이었단 이야기를 해 주면 고맙고. 한편으로는 섭섭한 건, 시대가 흘러가서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이나 아이들이 전혀 몰라줄 때. ‘할아버지 옛날에 만화 그렸어요? 뭐 그렸어요’ 그러는데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고 하는 거죠. 항상 옛날 만화 기억해주는 팬들에게 감사하고. 그리고 항상 나이 먹어서 내가 이 세상을 뜨더라도 옛날 어린이만화 순수하게 그렸던 거, 신문수는 그런 사람이었다라고 기억해주었으면 고맙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