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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산임수'의 명당. 예천-네이버캐스트

띨빡이 2009. 7. 14. 16:09

예천은 회룡포라는 관광코스 외에도 수많은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예천군지>에 따르면 두 개의 향교가 있으며 정자와 누각은 110여 개가 넘는다. 서원과 고택은 세기도 벅차다. 용문사를 비롯한 사찰도 14개나 되고, 절터도 15개를 훌쩍 넘는다. 신라 경문왕 10(870)에 두운선사가 창건한 용문사에는 국내 유일의 회전식 불경 보관대인 윤장대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대추나무로 만든 목각탱이 있다.

울창한 송림과 개울 위에 올라앉은 초간정

예천읍에서 10㎞ 떨어진 초간정(草澗亭)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자는 우거진 소나무 숲 속에 개울이 돌아 흐르는 경관 좋은 암반바위에 자리 잡고 있다. 정자에 걸터앉자 계곡 물소리가 청명하게 들린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시()와 서()를 논했을 선비들의 유유자적 삶이 그려진다. 사주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뒤쪽과 오른쪽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자연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정면 3,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정면 3칸 중 앞면의 좌측 2칸은 온돌방을 배치하고 나머지 칸에는 마루를 설치했는데, 이 마루에서는 전면의 개울을 바라보게 배치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초간 권문해(權文海)가 조선 선조 15(1582)에 건립했으나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을 광해군 4(1612)에 중건했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다시 불타는 등 수난을 거듭하다가 고종 7(1870)에 중창했다.

 

이 정자 기둥에는 도끼로 찍은 자국이 있는데 이것에 관한 전설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옥매(玉梅)라는 기생이 장구춤을 추다가 물에 떨어져 죽어 화가 난 그의 어머니가 도끼로 찍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은 예천 권씨들이 정자 주위를 거꾸로바퀴 도는 자에게 이 정자를 주겠다고 해서, 이 소식을 들은 어느 초립동이 아흔아홉 바퀴를 돌고 나머지 한 바퀴를 돌다가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 익사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도끼로 찍었다고 한다.

 

 

 

 

그림처럼 떠있는 ‘육지 속 작은 섬마을’

회룡포(回龍浦)는 한반도 최고의 물돌이 마을이다. 낙동강 상류의 지류인 내성천(乃城川) 350도로 마을을 휘돌아 흐른다. 나머지 10도마저 물을 둘렸더라면 ‘육지 속의 섬’이 되었을 터이다. 낙동강 줄기의 하회마을이나 강원도 영월의 동강도 물돌이만 치면 여기에 명함을 못 내민다. 마을로 들어가려면 구멍이 숭숭 뚫린 공사용 철판을 이어붙인 다리인 일명 ‘뿅뿅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가 생긴 것은 불과 20년 전. 그 전에는 바지를 걷어붙이고 물을 건넜다. 비록 우회하는 길이지만 이제는 차를 타고 들어갈 수도 있다. 개포면사무소 앞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마을 앞산인 비룡산에 오르면 회룡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정상 바로 밑에는 통일신라 때 의상대사의 제자인 운명대사가 세운 장안사가 있다. 최근에 중수해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절 앞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 장안사를 지나 400m를 더 오르면 회룡대(回龍臺)라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회룡포는 한 삽만 뜨면 섬이 되어버릴 것 같아 아슬아슬하다. 회룡포는 산과 강에 둘러싸인 ‘오지 중의 오지’. 한때는 죄인의 임시 귀양처였으며, 한국전쟁기에는 피난처이기도 했다. 사람이 들어와 산 것은 조선 고종 때. 예천의 아랫마을 의성(경북 의성군)에 살던 경주 김씨 일가가 소나무를 베고 논밭을 개간했다. 그래서 의성포란 이름을 얻었다. 이 곳이 물돌이 마을로 유명해지면서 의성군에 가서 의성포를 찾는 웃지 못할 일이 많아지자 군에서 ‘회룡포’란 이름을 따로 지었다.

 

 

토지를 갖고 매년 세금 내는 나무

석송령(石松靈)은 감천면 천향리 석평마을 입구에 있는 반송(盤松)으로 나이가 적어도 600살 이상으로 추정된다. 600여 년 전쯤에 큰 홍수가 나서 석관천(石串川) 상류에서 떠내려 오던 나무를 어떤 사람이 건져내어 이곳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나무는 지니고 있는 재산도 적지 않다. 1930년경에 당시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이라는 사람이 영험 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석송령(石松靈)’이라는 이름을 짓고 자기 소유의 땅 4757를 상속 등기해 주었다. 이 때부터 이 나무는 수목으로서는 드물게 토지를 가진 부자나무가 됐다. 2008년 기준으로 44250원을 세금으로 냈다.

 

석송령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일제시대에 이 나무가 미신 숭배의 대상이라 하여 일본인이 인부를 동원하여 나무를 베러 오다가 마을 어귀에서 넘어져 크게 다쳐 나무가 무사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마을 사람들이 공습을 피해 이 나무 밑에 숨어들어 한 사람의 피해도 없었다. 예천에는 세금을 내는 나무가 하나 더 있는데 용궁면 금남리 금원 마을에 있는 황목근(黃木根)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토지(12899)를 소유한 부자나무로 5월이면 노란 꽃을 피워 성을 ‘황’, 근본 있는 나무라는 뜻을 따 이름을 ‘목근’이라 지었다. 작년 기준 25220원의 세금을 냈다.

 

 

옛 선조들 숨결 담고 있는 마을

용문면 상금곡리에 있는 금당실마을을 찾았다. 마을은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담고 있는 돌담길, 선조들의 손길이 묻어 있는 고택, 문화재가 옛 형태 그대로 오롯이 보존되어 있다. 이 마을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로 정하려 했던 곳이라고 한다. 이성계가 신하에게 닭을 주면서 “이 닭이 울기 전에 용문을 도착하면 도읍을 정하겠노라”라고 했는데 닭이 도착하기 전에 울었기 때문에 취소했다고 한다정감록에는 “금당실은 우리나라 십승지지의 하나로 병마가 들지 못한다”고 해서 임진왜란 때에도 온전했던 곳이라 한다. 이곳엔 함양 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 박씨 압향조 박종린을 모신 추원재 및 사당, 조선 숙종 때 도승지 김빈을 모신 반송재 고택, 원주 변씨 입향조 변응녕을 모신 사괴당 고택, 구한말 세도가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저택 터가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으로 800m쯤 가면 예천 권씨 종택이 있다.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인 초간 권문해의 조부인 권오상이 지은 별당(보물 제457)과 권문해가 지은 안채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조선 중기 사대부 집안의 품격이 잘 드러나 있다. 종택은 별당과 연결되어 ㅁ자 아래에 ㄴ자를 연결한 형이다. 별당은 잡석으로 축대를 쌓아 세우고 중간 앞에 여러 단의 돌을 쌓아 건물 자체가 높고 웅장하며 고졸한 맛을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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