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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의 청정자원 무주-네이버캐스트

띨빡이 2009. 8. 4. 21:38

무주는 무풍의 무()와 주계의 주()를 따서 이름 지은 고을이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 서로 맞닿았던 요충지였다.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던지 백제는 주계를 붉은 내 적천(赤川)이라 불렀고, 후에 신라가 주계를 차지하자 이름을 단천(丹川)이라 고쳤는데 이것 역시 ‘붉은 강’이란 뜻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이 고장의 이름에 붉을 적자와 단자가 붙은 것을 가을 단풍 때문으로 잘못 알고 있다.

 

 

 

장쾌한 능선 따라 호연지기를 키우는 곳

덕유산(德裕山·1614m)은 무주와 장수, 경남 거창과 함양 등 4개 군에 걸쳐 있다. 정상인 향적봉을 중심으로 산줄기가 30㎞나 뻗어 있으며 넓게 퍼진 무수한 산이 물결치는 모습은 장중하기 이를 데 없다. 첩첩이 산과 산이 발밑에 깔렸고, 산들이 앞뒤로 수십 겹이나 늘어서 있다. 높고 낮은 봉우리가 어깨를 겯고 뻗어나간 산세가 너무나도 화려하고 엄숙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덕유산은 흙산으로 난리를 겪을 때에 숨어들면 적군이 찾지 못한데서 ‘덕()이 큰 산’”이라고 했다. 덕유능선을 제대로 보려면 향적봉에서 20분 거리의 중봉(中峰·1594m)에 올라야 한다. 능선은 푹 꺼지기도 하고 다시 되잡아 채며 올라서기도 한다. 한 굽이를 넘어서면 다시 다른 굽이가 시작된다. 능선에 마음을 빼앗기다 보면 모든 세상의 길이 한 겹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무주리조트의 곤돌라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향적봉을 오르려면 삼공리관광단지에서 출발, 백련사를 거쳐 오르거나 안성에서 칠연계곡을 거쳐 올라야 했다. 지금은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에서 쉬엄쉬엄 걸어서 20분이면 향적봉에 닿는다.

 

 

구절양장의 계곡마다 전설이 깃들어

설천면의 라제통문에서 덕유산 산록에 있는 백련사에 이르는 약 28㎞의 굽이진 계곡 일대를 구천동(九千洞)이라 한다. 옛날엔 구천동이라면 심산유곡의 대명사로 쓰인 적이 있다. 그만큼 구천동 골짜기가 어둡고 구불구불한 것을 두고 빗대어 말한 것. 장장 70리에 걸쳐 흐르는 계곡물은 곳곳에서 기암에 부딪히고 암반을 미끄러지는가 하면 어느 때는 폭포가 되고, 빨리 치닫다가 고요한 담을 이룬다. 구천동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성불군자 9000인이 살았으므로 구천인의 둔지라는 뜻에서 구천둔(九千屯)이라 하였다가 구천동으로 개칭됐다는 등 몇 가지 설이 전해오지만 구체적인 근거자료는 없다.

 

옛날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자 관문이었다는 라제통문에서 시작해 마지막 향적봉 정상까지 이어지는 구천동33은 숱한 전설과 지명의 유래가 전해온다. 33경 중 제14경 수경대까지는 관광단지 밖에 있으므로 외구천동, 15경 월하탄에서 제33경 덕유산 정상까지는 내구천동으로 나뉜다. 크고 작은 폭포와 소, 기암괴석과 여울이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한다. 계곡물은 여름에도 손이 시릴 정도로 차다. 걸터앉기 좋은 너른 바위가 많고, 물이 차가워 탁족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덕유산을 배경으로 그 중턱(해발 920m)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백련사는 구천동 계곡에서 유일한 사찰이다. 구천동 계곡에는 전에 십여 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오직 백련사만이 남아 있다. 백련사의 창건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고증자료가 없기 때문에 언제부터 사찰이 존재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구전을 통해 통일신라 신문왕 때 백련 스님이 초막을 짓고 수도하던 중 흰 연꽃이 솟아 나온 곳에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경내에는 매월당 부도, 백련사 계단, 정관당 부도 등의 문화재가 있다.

 

 

탁 트인 수려한 절경과 가을단풍의 명소

적상산(赤裳山·1029m)을 올랐다. 적상산은 4면이 층암절벽으로 둘러싸여 가을 단풍이 붉게 물들면 마치 여인네의 치마와 같다고 하여 적상(赤裳)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산이 험준하여 오르기가 힘들고 위에는 평탄한 분지가 있어 병기와 건물을 짓고 숨어 있을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실제로 산에 오르면 사적 146호로 지정된 적상산성을 구경할 수 있다. 석축 둘레만 5,127m, 높이는 2.1m에 달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폐허가 되고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적상산성은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전략 요충지로 왕에게 청하여 산성을 축성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조선여지승람>에 따르면 최소한 고려 중엽 거란의 2차 침입(1010) 이전에 축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고, 시대적 정황과 축성 방식 등을 볼 때 백제시대에 축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성안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도 세워지고, 절집도 들어앉았다. 1995년 양수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산 중턱에 호수가 생기자 서고는 호수 위로 이전했고, 절집도 위쪽으로 옮겼다. 산정호수를 만들면서 적상산 정상까지 도로를 냈다. 정상에서는 향적봉과 거칠봉, 남덕유산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적상산에 오르는 길에 꼭 들러야 할 두 군데가 있다. 머루와인 저장고와 천일폭포다. 저장고는 상부댐 설치를 위해 뚫었던 600m 길이의 터널 중 250m 공간을 와인 저장고로 탈바꿈했다. 50m만 걸어 들어가도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하다. 천일폭포는 하늘 아래 하나만 있다고 해서 ‘천일(天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5m가 넘는 절벽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장쾌하면서도 시원하다. 이 외에도 장도바위, 장군바위, 송대폭포, 안렴대 등의 명소가 있다.

 

 

 

 

반딧불이와 함께 떠나는 추억여행

무주는 반딧불이의 메카다. 매년 6월경이면 무주는 반딧불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로 불야성을 이룬다. 반딧불이는 약 2100여 종이 남극과 북극을 제외한 전 세계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형설지공(螢雪之功)’으로도 친숙한 반딧불이는 사람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가져다주며 환경지표를 측정하는 척도로서 이용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반딧불이를 흔히 반디, 반딧불, 개똥벌레 등으로 불려지기도 하지만 이는 각 지역마다 쓰이고 있는 방언이며 정확한 명명 표기는 ‘반딧불이’가 맞다.

 

반딧불이가 빛을 내는 주요 목적은 사랑이다. 암컷은 배우자를 찾기 위해 불빛을 발하고 수컷은 그 불빛을 보고 짝을 찾아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또한 반딧불이의 불빛은 자신을 방어하고 적으로부터 위험을 알려 주는 통신적 수단이기도 하다. 무주에서 발견되는 반딧불이 종()은 대략 3가지. 6월 초순부터 관찰되는 ‘운문산반딧불이’와 6월경에 출현하여 7월까지 활동하는 ‘애반딧불이, 그리고 국내에서 가장 큰 종으로 출현시기가 8월∼9월경이며 일몰 후 빛을 발광하는 ‘늦반딧불이’ 등 3종이 다량 서식하고 있다. 반딧불이는 산자락 계곡에 위치한 경사진 재래식 계단 논이나 물이 연중 마르지 않는 경사지의 습지나 못, 그리고 논 주변의 용수로 등이 최적 서식지이다. 그러나 서식 여건의 변화로 밀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 무주군 농업기술센터 김하곤 박사는 “개발하지 않고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자연의 상태가 반딧불이 생육에 최적 조건”이라며 “현재 대량사육 방법에 대한 특허를 갖고 있는 농업기술센터에서 축제 기간에 맞춰 인공적으로 5만∼10만 마리씩 제공하고 있다”며 반딧불이 생육에 관한 관심을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