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

[나의 발심수행] 사경수행 강경애 보살<상>

띨빡이 2009. 8. 4. 21:30

반야심경 사경 천일 후 뒤늦게 수행 입문
기사등록일 [2009년 08월 03일 13:38 월요일]
 

사경을 시작한 것도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되었으나, 본격적인 수행의 차원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어려서부터 세례 받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다가 결혼한 이후 시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절에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교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접한 절집분위기가 내 안방같이 편안했다. 전혀 이해 할 수 없고 알아듣기도 힘든 그 독경소리를 아무런 배타심 없이 받아들인 것은 아마도 전생의 인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기법회도 없던 그 시절. 똑딱거리는 스님의 목탁소리와 독경소리에 힘들어 하는데 은사이신 상덕 스님께서 잣죽 한 그릇을 쑤어 내 손을 붙들고는 해인사 원당암 혜암 노스님 앞으로 ‘화두’라는 것을 받으러 갔다. 지금은 입적하시고 안계시지만 자그마한 체구에 깡마르신 스님께서 ‘이 뭣꼬?’ 라는 화두를 내려주시며 선반에 얹어두지 말고 자나 깨나 간곡한 의정으로 공부를 풀어 나가라고 타이르시며 기뻐하셨다. 그게 벌써 30년 전 일이다.

그 후 송광사 수련회를 거쳐 용화사 선방, 원당암 등 비구니도량에서 스님들과 같이 가부좌 틀고 정진하였는데 세월이 흘러도 의정이 타파되지 않는 것은 내가 신심이 부족한 탓 인 것 같아 회의를 느끼게 됐다. 그러던 중 한 신문에서 본 “사경 신앙이 되살아나야 한다”는 제목의 현장 스님 기고문이 나의 온 정신을 흔들었다.

내게는 생소한 “사경이란 신앙이고 수행이고 기도이다”라는 글을 읽고 스님께 편지를 띄워 사경 채본을 부탁드렸더니 한 보따리나 되게 보내주셔서 그때부터 사경에 임하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사경은 부처님의 마음과 가르침을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가득 채우는 성스러운 행위”라고 말씀하셨고, “사경의 신앙은 경전의 뜻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는 의미도 크지만 자기의 원력과 신앙을 사경 속에 담아 신앙의 힘을 키워나가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셨다.

신심과 원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잘 정제된 청정수로 갈증을 해소하는 기분이었다. 스님께서는 필체를 내세우지 말고 정성을 다해 하루에 한 장씩 써서 백일기도 회향할 때 가져와 같이 회향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백일을 열 번쯤 회향했던 것 같다. 백일 내내 반야심경 쓰는 것이 기도의 전부였고 그러면서 필체도 조금씩 잡혀가는 듯 했다. 사념이 쉬어지고 마음이 고요하니 선근이 자라는 듯 했다.

다시 생활반경이 서울로 옮겨져서 어느 날 인사동 어귀를 지나는데 ‘사경 전시회’라는 큰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사경도 작품이 되어 전시회도 한다는 사실이 너무 반갑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전시회장에서 만난 분이 김경호 선생님이다. 내 실력과 안목으로 선생님의 작품을 논하는 망녕은 부리고 싶지 않다. 다만 그 정확한 솜씨와 바늘 끝도 허용하지 않는 집중력에 내 마음을 내려놓을 뿐이다.

이때부터 나는 그동안 많이 쓰는 것에만 매달렸던 사경에 대한 이해를 수행의 차원에서 다시 업그레이드시켜 글씨 한자 쓰는 데에도 법(法) 답게 써야했고 경문이 완성되면 금강저, 당초무늬, 연화무늬 등 경문에 걸 맞는 무늬로 장식함으로써 부처님께 공경의 예의를 갖추어야하니 번뇌 망상으로는 한글자도 쓸 수 없었다. 정말 어렵고 힘든 작업이지만 그 어려움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이 사경하는 과정에서 길러진다는 사실이 또 다르게 얻을 수 있는 기쁨이었다.

(보명화·71)


1008호 [2009년 08월 03일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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