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

은해사 한주 금용스님

띨빡이 2009. 7. 20. 14:36

금용스님은 20대 선방수좌, 30대 종단 행정, 중앙종회의원 등을 거친 종단 중진이었지만 30여 년전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인연따라 주어진 조건서 최선 다할뿐”

 

   바른불교로 행복충만 세상 만들고자

   ‘수행경전’인 법화경 공부에 매진 중

  

1960년대 정화 직후 20대 출가했다.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수좌였다. 전국의 선원을 다니며 오직 화두만 생각했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하지 않으면 죽어나가겠다는 일념만 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총무원의 부름을 받았다. 행정에 밝다는 이유였다.

할 일이 많아 보였다. 총무원을 바꾸는 것이 출가자가 우선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했다. 재무부장 규정부장도 맡았다. 1970년대 말 종단이 조계사 개운사로 나뉘어 싸울 때 한복판에 섰다. 1980년대 초 중앙종회의원에 피선됐다. 종단을 ‘개혁’ ‘정화’ 한다는 명분을 걸고 편을 만들고 ‘선봉’에 섰다. 졌다. 그리고 잊혀졌다….

지난 8일 남부지방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양, 말 그대로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같은 남부지방인데 경북 영천은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전형적 여름 날씨였다. 이곳도 전날 폭우가 쏟아졌다고 한다. 시내는 그 많은 빗물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흔적조차 없는데 은해사 앞을 흐르는 계곡은 불어난 물로 용트림을 하고 있었다.

윤달을 맞아 전국 사찰에서 열리는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가 이곳 은해사에서도 한창이었다. 관람객 1만명을 돌파한 성보박물관에다 경내를 가득 채운 신도, 제방의 큰 스님을 모시는 법회 안내 등 산사답지 않게 활기찬 모습이었다.

종무소에서 ‘2층 스님’을 뵈러왔다고 알렸다. 소식을 들은 스님이 ‘2층’에서 ‘어서 오시라’고 인사를 했다. 금용스님. 은해사 한주(閑主)다. 말 그대로 아무런 소임 없이 한가한 소임이다. 대개 나이 많은 어른 스님을 예우해서 붙인다.

스님의 원래 법명은 ‘범용’이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종단 중앙에서 많은 활동을 펼쳤다. 규정부장으로 종단 기강을 바로잡는 역할도 했으며 재정부장으로 종단 살림살이도 맡았다. 불교신문 주간을 맡아 운영을 돕기도 했다. 스님의 말이다. “70년대 말 당시 불교신문 재정이 어려워 아무도 맡지 않으려 했는데 내가 맡아서 운영했었다.

당시 윤전기가 있어 공무국 직원만도 30여 명에 달했다”고 회고했다. 1980년 신군부가 자행한 10.27 법난도 맞았다. 1980년대 초반 종단이 혼란스러울 때 중앙종회의원에 피선됐다. 입적한 전 총무원장 법장스님 등과 함께 종단에서 부장 소임을 맡아 함께 활동했다.

총무원에 들어오기 전에는 눈푸른 납자(衲子)였다. 은사스님은 대처승 출신으로 비구 종단에 합류한 화동파(和同派)였지만 스님은 오직 화두선 참구에만 매달렸다. 상원사 선원에서 5년을 시작으로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 공부했다. 문경 봉암사에 5년을 나고 양산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스님을 모시고 안거를 보냈으며 부산 선암사에서는 석암스님을 모셨다.

군에서 부사관 교육을 받아 행정에 밝다는 이유 때문에 총무원에 발탁돼 수좌에서 행정승으로 변모했다. 총무원의 말년은 종단 분규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종단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킨 1984년 총무원 침입을 주동한 행동대장이었다. 모든 소임을 내놓고 지리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30여년이 흘렀다.  

그동안 스님은 어떻게 지냈을까. “총무원을 무단으로 들어갔다는 죄목으로 4개월간 구치소에서 살고 나와 그 길로 지리산 영원사로 갔다. 전쟁 때 폐허가 된 영원사를 어느 노스님이 중창불사를 하셨는데 그 스님을 도와 운전도 하면서 공부했다. 6년을 보냈다.

” 스님은 그 6년간 <법화경>을 공부했다. “<법화경>은 전부터 몇 번 본적이 있는데 가장 마음에 와닿고 또 뜻이 그대로 보여 언젠가 본격적으로 공부해야지 하는 마음을 갖고 있던 터였다.”

스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총무원에서는 주로 불교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고민을 했다. 행정 체계도 바로 잡혀야 하고 포교도 더 활성화 돼야하며 승려 교육도 정비해야하는 등 종단의 미래, 한국불교의 전망 이런 고민들을 했다면 지리산에 와서는 내 공부에 신경을 쓰게 됐다.

아, 내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다 허사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내 공부 대신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법화경을 내 소의경전(所依經典) 삼아 천착했다.” 스님은 출가 전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한문경전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지리산에서 시작된 법화경 공부는 계속 이어져 이곳 은해사로 온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마침 은해사에는 승가대학원이 생겨 대강백으로 추앙받는 무비스님이 학장을 맡아 법화경을 강의했다. 스님은 그 수업을 청강해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법화경 공부는 30여 년 가까이 이어져 마침내 현토번역본을 펴내기에 이르렀다. 스님은 “한문 몇 줄 번역할 줄 아는 것은 별 것 아니고 오히려 선원에 다니며 선을 참구한 것이 법화경 경전의 본 뜻을 깨우치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며 “아직 세상에 내놓을 단계는 아니고 습작 수준”이라고 소개했다. 보완과 손질을 거쳐 인연이 닿는다면 책으로 내놓을 계획이라고 한다.

스님은 “법화경은 교화경전이 아니고 수행경전”이라며 “아뇩보리를 얻는 것이 궁극 목표”라고 말했다. 스님은 “법화경에서 말하는 삼승(三乘), 즉 성문 (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을 풀이하면 성문은 유위학(有爲學)이요 연각은 무위학(無爲學)인데 여기 까지는 다른 종교에서도 말하고 있다.

노자.장자도 연각 수준을 말한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불보살에 이르는 경지로 오직 불교만이 이를 말하고 있다. 보살이 곧 아뇩보리 수준이다. 즉 우리 불교는 이 보살의 수준에는 이르도록 해야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평안하고 불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3탑을 세워야한다”며 “첫째는 묘탑으로 절을 세우는 것이며, 둘째는 승탑으로 1만명 승려가 사는 규모의 총림을 세우는 것이며 세 번째는 인탑으로 신도조직이 결성돼야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이는 총림의 권위와 덕화를 본분으로 삼아 법으로 사회를 교화하면 한국이 아시아의 구심이 되고 아시아의 구심이 되면 세계의 구심이 된다. 스님들의 법을 뒷받침하는 신도 조직이 구성돼 사회로 확산한다면 불법(佛法)을 통한 사회 번영과 국민들의 행복이 보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내가 법화경을 공부하는 이유도, 이를 널리 알리려는 것도 올바른 불교를 통해 건강한 사회 평화와 행복이 충만한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어서”라고 덧붙였다.

스님은 스님들에 대해서도 “총무원을 나와 진짜 공부를 시작했다”며 “과거에는 깨달음을 통해 지역 교화가 가능했지만 지구촌 시대로 변한 지금은 과학과 학문 수준이 높아 보통 사람들도 연각의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 우리 수행자들이 그 이상의 부처님 말씀을 하지 않으면 수행자로서 인정도 받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며 “새로운 세계에 맞는 수준 있는 불교를 제시해야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어느 때가 가장 좋았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 때 그 때 최선을 다했다. 수좌로 선방을 다닐 때는 죽을 각오로 공부했고 총무원에서는 최선을 다해 종단과 한국불교를 걱정하고 행정을 처리했다. 소임을 놓고 공부할 때는 또 전부를 바쳤다. 인연 따라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했다.

 

 

 

 금용스님은…

 

1959년 구례 화엄사에서 정혜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금용스님은 그 후 일타스님 밑으로 건당했다.

평창 상원사 문경 봉암사 양산 통도사 극락암 부산 선암사 범어사 등에서 10여년을 안거했으며, 총무원 규정.재무.교무부장, 불교신문 주간, 제8대 중앙종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일타스님을 모신 뒤부터 줄곧 은해사에서 주석하는 스님은 예불, 대중공양, 참선, 공부 등으로 매일을 보낸다.

스님은 “자장면 사먹으러 용달차 끌고 요 앞 마을을 나가는 것이 가장 먼 외출”이라고 말했다. 사중에서 나오는 한 달 50만원 용돈으로도 살아가는데 충분하다는 스님은 “내 신도 만들 마음도, 절 지을 마음도 없이 이렇게 공부하고 소일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며 웃었다.

은해사=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541호/ 7월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