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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향의 고장 거창-네이버캐스트

띨빡이 2009. 6. 15. 01:48

거창에는 금원산, 기백산, 단지봉 등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가 10개 이상이나 된다. 높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 사이로 냇물이 흐르는데 조선 중기 석루 이경전(李慶全) 선생은 거창을 보고 “푸른 산봉우리들 사방에 모였는데, 한 가닥 냇물이 동쪽으로 비스듬히 흐르도다”라고 했다.

 

 

그 옛날 거창으로 가는 길은 힘들었다. 지금이야 대구와 광주를 잇는 88올림픽고속도로가 있어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이전에는 덕유산과 가야산에서 뻗은 산들을 넘어야만 거창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거창에선 “울면서 왔다가 울면서 간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한양 중앙관리가 거창으로 발령 받으면 교통이 불편해 ‘내가 이 불편한 곳에서 어떻게 살까’하고 울었다가 막상 임기가 끝나 거창을 떠날 때는 물자가 풍부하고 산수 경치가 좋아 떠나기 싫어 또 울었다는 것이다.

 

거창은 예부터 거열(居列), 거타(居陀), 한들, 거창(居昌), 아림(娥林), 제창(濟唱) 등으로 불렸다. 이것을 종합하면 ‘크고 넓은 들판’이라는 뜻이다. 거창분지가 내륙산악지대에서 보기 드문 평야이므로 생긴 이름이다. 지금도 거창평야의 일부를 한들이라 부르고 있는데 한들은 한밭(大田), 한길(大路)과 마찬가지로 큰 들판이라는 뜻이다. 이 땅에서는 사과, 딸기, 포도, , 수박, 버섯, 오미자, , 양파, 배추, 무 등이 특산물로 생산된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거창은 땅이 기름지다”고 했다. 현재 거창읍에는 영천(濚川)이 흐르는데 이는 서쪽 북상의 월령계곡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성천(星川)과 소정계곡에서 남류하는 갈천(葛川)이 합한 위천(渭川)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 영천은 아월천(阿月川)과 합류하여 황강을 이루고, 황강은 흘러가면서 남상면에서 동류하는 고천(古川)을 받아들여 합천호로 유입한다. 거창이라는 이름은 신라 경덕왕 16(757)에 처음 불린 후 주변 영역과 분할, 합병되면서 여러 지명으로 불리어 오다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창읍에서 서북쪽으로 16㎞ 정도 가면 수승대(搜勝臺) 관광지가 나온다. 주차장을 지나면 제일 먼저 구연서원 관수루(觀水樓)가 눈에 들어온다. 관수루는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사림이 세운 구연서원의 문루로 영조 16(1740)에 건립했다. 관수란 <맹자>에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관수루를 지나면 거북 모양의 특이한 바위가 나타난다. 수승대이다. 수승대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여 구연(龜淵)을 만들면서 빚어 놓은 거북 모양의 커다란 천연 바위 대()이다. 대의 높이는 약 10m, 넓이는 50㎡에 이르며 그 생김새가 마치 거북과 같아 구연대 또는 암구대(岩龜臺)라고도 한다. 또 수많은 현인들과 은사들이 찾았던 대라 하여 모현대(慕賢臺)라 불렀다. 수승대는 옛날 백제의 국세가 쇠약해져서 멸망할 무렵 백제의 사신을 이 대에서 송별하고 돌아오지 못함을 슬퍼해 처음에는 근심 수(), 보낼 송()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1543년 이황 선생이 거창을 지나면서 그 내력을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고 수송과 수승이 소리가 같으므로 ‘수승’으로 고친다고 이른 4율시에서 비롯됐다. 바위둘레에는 이황 선생의 옛 글이 새겨져 있다.

 

“수송을 수승이라 새롭게 이름 하노니/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구나/먼 산의 꽃들은 방긋거리고/응달진 골짜기에 잔설이 보이누나/나의 눈 수승대로 자꾸만 쏠려/수승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언젠가 한 두루미 술을 가지고/수승의 절경을 만끽 하리라” 수승대 앞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과 세필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연반석이란 거북이가 입을 벌린 장주암(藏酒岩)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룩을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이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이다. 바위 한쪽에 오목한 모양의 웅덩이가 있는데 이곳에 한 말의 막걸리를 넣었다가 스승에게서 합격을 받으면 막걸리 한 사발씩을 먹었다는 장주갑(藏酒岬)이다.

 

구연교 다리를 지나면 요수 신권(愼權)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친 곳인 요수정(樂水停)이라는 정자가 눈앞에 들어온다. 정면 3, 측면 2칸의 규모로 자연암반을 그대로 초석으로 이용했다. 정자의 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이고 사방에 계자 난간을 둘렀다. 가구의 짜임이 견실하고 네 곳의 추녀에는 정연한 부채살 형식의 서까래를 배치해 격조 높은 정자건물의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수승대는 계곡 수량도 풍부하거니와 주변은 솔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소나무는 휘감겨 오르는 몸의 곡선과 비늘로 갈라진 껍질이 꿈틀거리는 한 무리의 용들과 닮았다. 한 줄 뻗은 가지에 활짝 펼친 갈퀴와, 닿을 듯한 머리에 날렵한 수염까지. 제 키를 세워 서서히 하늘로 오르는 모양이다.

 

수승대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는 황산리 신씨고가 마을이 있다. 마을 어귀에는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 600년에 달하는 고목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내 고가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지방 반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마을 옛담장은 향촌마을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고이 간직하고 있어 등록문화재로 등재, 보존 관리되고 있다. 10가구가 민박을 운영해 옛 선조들의 주거생활을 체험할 수 있다.

 

 

금원산(金猿山·1353m)을 올랐다. 비가 온 다음날이라 유달리 상쾌하다. 바위 위로 떨어지는 햇살의 시린 기운과 산기슭 나무 위로 떨어지는 햇살의 양명한 기운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계곡 바닥 이곳저곳에 나뭇잎이 피어나 있다. 봄을 지나 완연해진 여름기운에 볼을 부비고 있다. 능선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부드럽고 섬세한 몸놀림으로 산을 포옹한다.

 

금원산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옛날 금원숭이가 하도 날뛰는 바람에 한 도승이 그를 바위 속에 가두었다고 한다. 그 바위는 마치 원숭이 얼굴처럼 생겨 낯바위라 하는데 음의 바뀜으로 납바위라 부르고 있다. 금원산에는 이 외에도 숱한 전설이 얽혀 있다. 달암 이원달 선생과 그의 부인 김씨가 얽힌 금달암(金達岩), 효자 반전이 왜구를 피해 그의 아버지를 업고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피를 흘렸다는 마슬암(磨膝岩), 하늘에서 세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 하는 선녀담(仙女潭) 등이 널려 있다. 금원산에는 크게 이름난 두 골짜기가 있다. 유안청 계곡과 지재미골이다. 유안청 계곡은 조선 중기 이 고장 선비들이 지방 향시를 목표로 공부하던 유안청이 자리한 골짜기로 유안청폭포를 비롯한 자운폭포와 소·담이 주변 숲과 어우러져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유안청폭포는 소설가 이태가 쓴 <남부군>에 빨치산 남녀 오백여 명이 목욕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지재미골 초입에는 문바위와 보물 530호인 가섭사지 마애삼존불이 있다. 문바위(門岩)는 옛 가섭사 일주문에 해당하는 가람 수호신으로 우리나라에서 단일 바위로는 가장 큰 바위로 알려져 있다. 바위 앞면에는 고려 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지켜 순절한 이원달 선생을 기려 ‘달암 이선생 순절동(達岩 李先生 殉節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가섭사지 뒤의 돌계단을 오르면 바위굴이 있고 안쪽 남향 바위에 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중앙의 부처가 두 보살을 좌우로 거느린 모양이다. 중앙은 아미타여래, 오른쪽은 관음보살, 왼쪽은 지장보살로 보인다. 연꽃 수미단 대좌 위의 보존불은 넓적한 얼굴에 삼각형의 코, 얼굴에 비해 작은 눈과 입, 크지만 밋밋한 귀가 토속적 인상을 준다. 좌우보살의 얼굴도 비슷한데 화려한 옷자락은 조금은 번잡한 느낌이다.

 

 

거열산성(居列山城)은 일명 건흥산성(乾興山城)이라고도 한다. 덕유산 줄기에 있는 건흥산(563m) 꼭대기에 있으며, 산 아래 쪽에서 성곽이 보이지 않게 산의 지세와 능선의 기복을 이용하여 축성한 요새와 같은 산성이다. 성벽은 자연석과 잘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지형에 따라 39m의 높이로 쌓아 올렸다. 성벽의 둘레는 약 2.1㎞이고 폭은 아랫부분이 7m, 윗부분이 4m이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허물어져 버렸지만, 주변에는 성벽에 쓰였던 석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성의 축조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 지방이 신라와 백제 사이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인 만큼 삼국시대 말기에 신라나 백제가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 3(663)에 신라의 김흥순과 천존이 백제의 거열성을 함락하고 700여 명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거열성이 바로 이 산성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그 유민들이 3년 동안이나 백제의 부흥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기도 하다. 거열산성을 오르는 입구에는 건계정(健溪亭)이 자리 잡고 있다. 영천의 맑은 물 위에 꼬리를 담그고 거열산성을 향해 기어오르는 거북바위 등 위에 지어진 거창 장씨(章氏)의 정자이다. 주위의 노송이나 백일홍과 잘 어울린 정자지만, 옆에 똑같은 이름의 음식점이 들어서 있어 자꾸 시선을 회피하게 된다. 거열산성은 1983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다음 조각공원과 산책로를 만들어 주민들이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즐기려 자주 찾는다.

 

 

남덕유산 삿갈골샘 계곡을 따라 맑은 물이 바위 벼랑을 끼고 돌아 흐르는 월성계곡은 곳곳에 절경을 빚어낸다. 월성계곡이라 부른 것은 계곡 상류에 월성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 왕자 서동(薯童)이 신라 공주 선화를 꾀어서 백제의 도읍 부여로 돌아가던 길에 쉬어 간 곳이라고 한다. 또 신라의 사신이 후백제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가는 도중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였기에 신표 인장을 버리고 달아났던 곳이라고도 한다.

 

월성계곡의 첫머리는 강선대(降仙臺)와 모암정(帽岩亭)이다. 강선대는 조선 인조 때 척화신 동계 정온(鄭蘊) 선생이 남한산성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던 덕유산 모리재 초입에 있는 명소로 경치가 좋아서 신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닐었다는 전설이 있다. 대를 들러리하고 있는 맞은편 고숲(古林)에는 모암 임지예(林芝藝)를 기려 세운 모암정이 물과 어울린다.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계곡을 돌 때마다 마을이 있고 넓은 반석이 개울을 따라 펼쳐진다. 창선리에 이르면 암반을 타고 흐르는 물 흐름이 마치 눈이 흩날리는 모습같다 하여 분설담(濆雪潭)이라 부르는 명소가 나온다. 바위 벼랑을 끼고 돌아 흐르는 물길 아래 누운 반석이 물결에 패이고 패여 물고기 비늘 형상을 이룬다. 분설담 위쪽에는 마치 양 날개로 병사들의 사열을 받고 있는 듯한 당당한 위풍의 장군바위가 서 있다. 17세기 화가 진재 김윤겸(金允謙)의 진경산수 화첩에 그려진 경치를 그대로 빼닮았다.


 

월성에서 황점으로 오르는 길 중간 지점에는 사선대(四仙臺)가 있다.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머물러 송기(宋基) 또는 송대(宋臺)라고 불렀다. 1909년 고종의 5남 의친왕 강()이 나라가 어지러울 때 전() 승지 정태균을 찾아와 머물면서 북상·위천 지방의 우국청년들과 이곳 일대를 뒷날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준비하던 중 일제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한 구국의 한이 서린 곳이다. 왕실의 선원(璿源)을 뜻한 이름으로 사선대(思璿臺)라 부른 것을, 바위 포갬이 4층이고 돌 위에서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에 의해 사선대라고 부른다. 기단 위의 3층 석탑을 방불케 하는 사선대 맨 위 바위 모양은 마치 거북 같기도 하고, 봉황새 모양 같기도 한데, 그 머리 부분이 남덕유산을 바라보고 있다.

 

 

거창에서 산청 쪽으로 가다보면 신원면이 나온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거창사건을 추모하기 위한 공원이 있다. 거창사건은 한국전쟁 중, 1951년 2월 9에서 11일까지 거창군 신원면에서 마을 주민들이 일부 국군의 총검에 학살된 사건이다. 거창사건은 일어난 지 3년만인 1954년 유족들이 유골을 수습하면서 성별조차 구분할 수 없어서 큰 뼈는 남자, 중간 뼈는 여자, 작은 뼈는 어린이로 구분하여 합동묘를 조성했다. 이후 정부의 탄압으로 묘역은 파헤쳐지고, 위령비는 글자 한 자 한 자 정으로 지워서 땅속에 파묻히는 수모를 당했다. 1996 1월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2004 4월 공사를 완료하고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됐다.

 


공원 입구 추모문을 들어서면 ‘하늘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뜻을 지닌 천유문(天羑門)이 눈에 들어온다. 천유문을 지나면 억울하게 희생당한 719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위패봉안각이 오른쪽에 있다. 진입광장을 지나면 위령탑이 우뚝 서 있다. 위령탑 좌우측에는 군상이 있는데, 오른쪽 군상은 후손들의 정성어린 위로 속에 한을 풀고 승천의 기쁨을 만끽하는 영령들과 유족들을 환조로 표현했다. 좌측의 군상은 고인들에게 심대한 피해를 끼친 국군들이 진심으로 영령들과 유족들에게 참회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위령탑 뒤로는 669기를 영탑 형태로 조성하고 전통 담장을 설치한 묘역이 있다.

 

거창사건은 한국전쟁이 만든 우리 역사의 비극이자, 고립과 단절이 부른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거창이 고향인 시인 신달자는 <넋이여 아직도 잠 못 이루고 있는가>라는 시에서 “그 살점 뜯기는 시간을 밟고 시간은 빠르게도 지나갔다/무슨 이런 거짓말같은 세월이 있다더냐/아직도 그 생생한 영혼들의 부릅뜬 눈 감지도 못했는데…(중략)/시퍼런 소나무며 흐르는 푸른 물이 역사의 증인이 돼 소리치는 그 날이 오고야 말 것임을”라며 억울하게 죽어간 양민들의 영혼을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