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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 압델 나세르

띨빡이 2009. 4. 19. 20:50

가말 압델 나세르

 


1954년, 이집트의 정세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자유장교단’이란 세력이 주도한 군부의 쿠데타가 성공,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시작된 지 수개월이 흘러 있었다. 국민들은 이집트의 앞날에 대한 불안과 기대로 조마조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혁명주체인 ‘자유장교단’ 내에서는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초대 대통령 겸 총리 나기브와 쿠데타의 주도자이며 무대 뒤의 실세인 내무장관 나세르 간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2월 25일, 나기브가 총리 직에서 사임하고 가택에 연금되었으며, 나세르가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는 경천동지할 소식이 전해진다. 이에 여론이 크게 반발하며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다. 전쟁 영웅인 나기브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 만만치는 않았던 것이다. 자칫 혁명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나세르는 한 발 물러나 나기브를 다시 대통령 겸 총리로 추대한다. 불과 하루 사이의 해프닝 끝에 나기브는 다시 권좌에 오른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나세르 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다음이었다.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나기브는 2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다시 총리 직에서 물러난다. 나세르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 번 권좌에 오르고, 다음날인 1954년 4월 18일부터 정식으로 업무를 개시한다. 가멜 압델 나세르의 천하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

 

 

이집트는 우리에게는 피라미드와 파라오의 나라로, 또한 고대의 강대국이자 문명국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기원전 6세기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줄곧 외세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집트는 1922년에 독립을 쟁취했지만, 허울뿐인 입헌군주제의 배후에서는 여전히 영국의 입김이 작용하며 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했다. 이처럼 오래 지속된 외세의 압력에 대항하여 이집트는 물론이고 아랍 전체의 자존심을 회복한 주역으로 평가되는 인물이 바로 나세르다. 가말 압델 나세르는 1918년 1월 15일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반항적이고 독립적인 기질을 보였으며, 고등학교 재학 시절 철저한 반영(反英,영국에 반대) 의식을 확립한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배속된 부대에서 나세르는 안와르 사다트(훗날 제3대 이집트 대통령)라는 동료 장교와 만나고, 두 사람의 인연은 이후 이집트의 현대사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집트에서 이른바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에 따라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인기가 높아지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은 이집트 국왕을 무력으로 위협해서 친영 인사를 총리에 임명한다.


이 사건에 분노한 청년 장교 나세르는 외세 타파를 위한 본격적인 행동의 첫걸음으로 ‘자유장교단’이란 이름의 비밀 조직을 결성하고,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이란 신분을 이용해 젊은 장교들을 연이어 포섭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집트의 반영 정서가 더욱 높아지자, 영국은 1946년에 이르러 수에즈 운하에 배치된 소수의 병력을 제외한 자국 군대를 이집트에서 점차적으로 완전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바야흐로 이집트에도 완전한 독립의 가능성이 대두한 것이다.

 


1948년 5월 15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인 이스라엘이 수립되자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이 선전포고에 나서며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한다. 하지만 줄곧 영국군 산하에서 보조적인 역할만 담당했던 이집트 군은 실전경험 부족으로 연전연패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보급품은 물론이고 전술조차 변변찮은 상황에서 악전고투하던 나세르 소령은 무능한 군부와 정계의 고위층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는다. 단순히 반영 민족주의 쪽이었던 그의 혁명노선이 정치 및 사회 개혁 쪽으로 변화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전쟁으로 대거 손실된 ‘자유장교단’의 세력을 재규합하는 과정에서 나세르는 전쟁 영웅인 50대의 무하마드 나기브 장군을 동지로 포섭한다. 자신을 포함한 ‘자유장교단’ 대다수가 아직 30대에 불과했으므로, 보다 나이 지긋하고 인기 있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군주인 파루크 왕은 사치와 퇴폐 행각으로 인해 국민의 원성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 영국도 이집트에서 발을 빼려는 참이었으므로, 혁명을 위한 분위기는 완전히 무르익은 상황이었다.

 

1952년 7월 23일 ‘자유장교단’ 소속의 장교들은 나세르의 지휘에 따라 행동에 돌입한다. 쿠데타는 손쉽게 성공을 거두었고, 곧바로 나기브가 전면에 나서 민심을 수습하고 초대 대통령 겸 총리에 오른다. 그러나 온건파인 나기브와 개혁파인 나세르 사이의 갈등은 불가피한 일이었고, 치열한 권력 다툼 끝에 나기브가 퇴진하고 나세르가 권력을 장악한다. 머지않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 측에서 암살을 기도하자, 나세르는 그 기회를 틈타 정적들을 대거 숙청한다. 그리고 1956년에 신헌법에 따른 국민투표에서 단독 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집권 이후 나세르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참석하는 등 비동맹 중립주의 노선을 내세운다. 중국의 저우언라이, 인도의 네루,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등 제3세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들과도 돈독한 유대를 과시한다. 하지만 해외의 군사적, 경제적 원조가 절실한 이집트로선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중 어느 하나를 동맹국으로 선택해야 하는 처지였다. 양측을 놓고 저울질을 하던 나세르는 1955년에 소련제 무기 도입 협정에 서명하고, 영국과 미국은 이에 대한 반발로 나일 강의 아스완 댐 건설을 위한 경제 원조 제안을 마무리 단계에서 돌연 취소한다. 이에 나세르는 1956년 7월 26일, 댐 건설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라며 수에즈 운하의 전격적인 국유화를 선언한다. 시나이 반도의 수에즈 운하는 1869년에 개통된 이래 이집트의 현대사에서 갖가지 쟁점의 핵심에 놓여 있었다.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해주는 이 중요한 물길은 프랑스의 기술 및 자본에 이집트의 노동력이 합쳐져 완성되었지만, 이후 재정난에 직면한 이집트 정부가 운하 회사의 주식을 대거 매각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소유가 되어 있었다.

 

 

 

서구 세계에 던진 도전장과 마찬가지인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에 아랍 세계는 열광한다. 그러나 3개월 뒤에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연합군이 수에즈 운하로 진격하며 시작된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에서 이집트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한다. 다행히도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이기지 못한 영국과 프랑스가 협상 끝에 물러남으로써, 이후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의 소유이자 주요 외화벌이의 수단이 된다. 이집트의 군사적 패배가 나세르에게는 정치적 승리를 선사한 셈이었다.

 

 

이스라엘과의 대결은 훗날 나세르의 정치 생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967년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에 긴장이 감돌자, 나세르는 시나이 반도로 병력을 이동시킴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음을 시사한다. 이에 이스라엘은 6월 5일 새벽, 이집트의 주요 공군 비행장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전체 항공기의 90% 이상을 파괴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지나 수에즈 운하까지 장악한다. 제3차 중동전쟁, 일명 ‘6일 전쟁’ 동안 이집트와 시리아와 요르단은 이스라엘에게 철저히 유린당한다.


충격을 받은 나세르는 대통령직 사임 의사를 밝혔지만, 국민 여론의 반대로 인해 사임을 철회한다.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메우기 위해 이집트는 평소 경원시하던 친서방적 아랍 국가들에 손을 벌리는 굴욕을 감수하는 신세가 된다. 대대적인 체면 실추에도 불구하고 나세르는 계속해서 아랍의 맹주 역할에 여념이 없었다. 1970년에 요르단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사이에 유혈 충돌이 벌어지자, 그는 카이로에서 아랍 국가 정상회담을 열고 양측의 화해를 도모한다. 9월 28일, 회담을 마치고 떠나는 각국 지도자들을 공항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던 길에 나세르는 심장 발작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날 오후 6시경 사망한다. 정치 무대며 국제 무대에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말 뜻밖이고 갑작스러운 퇴장이었다.


 

 

군부 쿠데타로 권좌에 올라, 카리스마적인 언행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며, 동정 받을 만한 최후를 맞이한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 평가하기란 세계 어디에서나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나세르는 20세기 중동 정계의 거물이자 범아랍주의, 일명 ‘나세르주의’의 제창자로 명성이 높다. 이집트인들은 생전의 그를 영웅시하며 ‘대통령’ 대신 ‘라이스’(Rais, 두목)라고 불렀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비록 외양은 공화국의 대통령이었지만, 사실은 독재자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한 범아랍주의조차도 사실은 실현 불가능한 몽상에 가까웠고, 어디까지나 본인이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를 도모하려는 것에 불과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1958년 2월 21일, 이른바 ‘통일 아랍공화국(UAR)’을 결성하고 나세르를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지만 갈등 끝에 3년 반 뒤에는 다시 해체된다. 아랍의 맹주를 자처하는 그의 행보는 아랍 국가 지도자들에게도 눈엣가시였다. “아랍의 자존심을 세웠다”는 평가도 일리는 있지만, 이집트가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외교에서는 승승장구한 나세르도 국정 운영에서 만큼은 연이어 쓴맛을 보아야 했다. 혁명 정부가 서둘러 단행한 토지 개혁은 만만찮은 부작용을 낳았으며, 사회 개혁은 사실상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정부 재정 마련을 위해 나세르 정권은 대부분의 기간산업체와 기업들을 국유화하고, 외국인 및 반동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은행과 신문사까지 장악했다. 1962년에는 이집트를 ‘사회주의 국가’로 공식 선포했지만, 농업과 이슬람교를 여전히 중요한 축으로 삼는 나세르 식의 ‘아랍 사회주의’는 사실상 허울뿐이었다. “급격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랍 사회주의’라는 꼬리표를 단 새로운 법률이 날마다 공포되고 있지만, 너무나도 얄궂게도, 놀라운 사건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태생으로 이집트에서 자란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자서전에서 묘사한 나세르 정권 당시의 풍경이다. 미국에서의 대학 졸업과 대학원 진학 사이에 그는 1년 동안 카이로에 돌아와 부친의 사업을 도운 바 있었다. 그런데 이때의 일이 문제가 되어 그는 향후 15년 넘게 이집트로 돌아가지 못한다. 부친이 아들의 명의를 빌려 편법적인 외환 거래를 하다 적발되는 바람에, 미국에 머물던 사이드도 졸지에 ‘외환거래법 위반사범’이 된 까닭이다.


나세르 정부의 ‘아랍 사회주의’ 치하에서 외화 유출 방지라는 미명 하에 수입 및 외환 거래가 전격 금지되지만 않았더라면, 에드워드 사이드의 삶은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고향 팔레스타인에 이어 제2의 고향 이집트까지 연이어 상실한 그는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비롯된 의문을 훗날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제목의 책에 담아낸다. 어쩌면 사이드의 업적이야말로 “서구에 대항한 아랍인의 자존심 세우기”라는 나세르의 업적과도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도 한 사람은 칼로, 또 한 사람은 펜으로 했다는 것뿐이리라.

 

 

우리나라에서 나세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그의 사후인 1970년대의 일이었다. 따라서 그에 관한 단행본 자료는 그 당시에 나온 것이 대부분이고, 현재로선 모두 절판되어 구하기가 힘들다. 나세르에 대한 최근의 재조명, 그리고 국제적이고 역사적인 그의 위상을 생각해 볼 때에는 적잖이 아쉬운 일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970~80년대에 간행되었던 ‘세계 대통령, 수상 대회고록’이라는 이름의 전집 가운데 한 권인 <낫세르>(편집부 옮김, 대한서적공사, 1985)다. 여기에는 나세르의 저서인


이슬람의 세계사

<혁명의 철학>과 로버트 세인트 존이 쓴 전기 <엘 라이스>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일어중역본이라는 문제점이 있지만, 그래도 나세르에 관한 우리말 책 중에서는 제일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의 생애와 업적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책으로는 ‘인물로 읽는 세계사’라는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인 존 드 상시의 <나세르>(김한경 옮김, 대현출판사, 1993)가 있다. 미국의 첼시 하우스 출판사에서 펴낸 ‘과거와 현재의 전 세계 지도자들’이라는 총서 가운데 하나인데, 얇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사진 자료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국내 저자의 단행본으로는 언론인 겸 번역가인 이상두의 <나세르와 아랍 혁명>(태양문화사, 1977)이 유일무이하지 않나 싶다. 저자는 대학 시절에 일어난 나세르의 혁명 소식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관련서를 탐독한 끝에 이 저서를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비록 2차 문헌에 의존했다는 한계는 있을망정 국내 저자의 저서로서는 상당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세르의 집권 당시 아랍 세계의 상황을 살펴보는 데에는 막심 로댕송의 <아랍의 거부>(임재경 옮김, 두레, 1979)가 좋다. 훗날 같은 출판사에서 <아랍과 이스라엘의 투쟁>(1991)이란 제목으로 재출간된 바 있다.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책은 아이라 M. 라피두스의 <이슬람의 세계사>(전2권, 신연성 옮김, 이산, 2008)이다. 1,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나 포괄적인 내용에 있어서 지금까지 국내에 나온 아랍-이슬람 관련서 중에서도 단연 최고가 아닐까 싶다. 나세르에 대한 내용은 이 책의 제2권에서 짧게 등장하는데, 그 전후의 이집트 및 아랍의 상황이 잘 정리되어 있다.

 

 

 

 

 

                                 [출처-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