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한국의 천주교

띨빡이 2009. 4. 19. 13:16

원효로성당 / 서울 용산구 원효로. 1902년에 완공한 프랑스 고딕풍 건축물로서 용산신학교의 부속성당. 사적 제255호.

동양에 천주교를 처음으로 전파한 성직자들은 인류애의 사상과 개척정신에 불타고 있던 예수회 신부들이었는데, 한국에 처음 전해진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수차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한 이수광()이 M.리치의 《천주실의()》 《중우론()》 등을 그의 저서《지봉유설()》에 소개한 데서 비롯된다. 한편, 이수광과 같은 시대의 허균()도 베이징[]에서 천주교의 12가지 기도문인 《십이단()》을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그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다. 조선 건국 초부터 숭유억불책()을 써온 결과 공리공론()의 당쟁만을 일삼는 주자학()이 성행하였고, 이같은 풍조에 싫증을 느낀 일부 학자층에서는 현실적인 학문, 즉 실학()을 내세우게 되었으니 이수광은 바로 그 선구적 인물이었다.

실학은 필연적으로 천주교를 믿는 서학(西)과 결부되어 그로부터 100년이 경과한 1700년대의 실학자 이익()은 그의 문인 안정복() 등과 더불어 천주교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특히 M.리치의 《천주실의》, 아담 샬[]의 《주제군징()》, 이탈리아 신부 판도자의 《칠극()》 등을 애독하고 이들에 대한 발문()을 쓰기도 하였다. 이익과 안정복 사이에 검토된 천주교는 마침내 이들 문인에 의해 이것을 믿는 신봉운동()으로 발전하였으니, 그 주동자는 권철신() ·일신() 형제와 정약전() ·약종() ·약용()의 3형제 등이었다. 이들은 교리연구회를 열어 권철신 지도하에 수도생활을 시작하였고 권철신의 매부 이벽()도 참가하였다. 또한 정약전의 매부 이승훈()도 참가하여 그는 교리연구차 베이징으로 건너가 1784년 2월, 귀국에 앞서 예수회 신부 그라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신자가 되었다. 그는 귀국 후 이벽 ·권철신 형제에게 대세()를 주었는데, 이들은 후에 조선교회 창설의 주동 인물이 되었다.

이리하여 정약전 3형제, 중국어 역관 김범우() ·최인길(), 상인() 출신의 이단원() 등 수십 명에게 대세를 주어 84년 겨울, 역관 김범우 집 대청에서 주일미사를 드리고 최초의 조선천주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한국의 천주교는 박해가 계속되는 형극()의 길을 걸어야 했으며, 그러한 박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때까지 계속되었다. 먼저 85년에는 전해 겨울에 창설한 조선천주교회가 형조 금리()에게 발각되어 서적 ·성화가 압수되고 김범우가 희생되었다. 86년에 재건하였으나 91년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고발로 이른바 ‘진산사건()’이 터져 정약용의 외종()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처형당하였다. 95년 교회가 창설된 지 11년 만에 처음으로 성직자를 모시게 되었는데, 그가 중국인 주문모() 신부이다.

주신부의 내한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4,000명의 신도수를 헤아리게 되었으나 그의 밀입국을 밀고한 자가 있어, 주신부를 피신시키고 신부로 가장하였던 지황() ·윤유일()은 포도청에서 타살 ·순교당하였다. 그 후 주신부는 6년간을 숨어서 전교에 힘썼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총회장 최창현()이 투옥되고, 오가작통법()을 써서 교인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임금의 교서가 전국에 내려지자, 포졸들을 전국에 풀어 이단원을 비롯하여 이가환() ·현감 이승훈, 승지 정약용, 홍낙민() ·권철신 ·정약종, 여회장()인 강완숙()과 그 가족을 잡아냈으며, 이어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다. 이때 희생된 교인수는 300명이 넘었으며, 나중에 자수한 주문모 신부도 한강 새남터에서 효수()되니, 이때부터 외국인 성직자를 새남터 형장에서 처형하는 선례가 되었다.

이리하여 천주교는 다시 지하로 잠복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36년간이나 목자() 없이 지내다가 강원도로 피신하였던 신대보()와 그의 고종사촌인 이여진() 등의 노력으로 재건되었는데, 이여진은 수차 베이징에 가서 조선 교회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이렇게 재건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인 11년, 조선 국왕은 다시 전국에 명령하여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게 하여 이른바 ‘지방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충청도를 비롯하여 경상도 ·강원도 등에서 수백 명이 잡혀 사형 또는 귀양을 갔으며, 일부는 석방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 박해가 일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교회재건운동을 일으킨 청년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의 둘째 아들 하상() 바오로이다.

정하상은 16년부터 거의 해마다 베이징을 왕래하면서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전교에도 힘썼다. 그러는 사이에도 27년 또다시 박해가 전라도 지방에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90여 명이 체포되었으나 다행히 순교자는 10여 명에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되었다. 31년 9월 9일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두 가지 교서를 발표하였으니, 그 하나는 조선교회를 베이징교구로부터 분리, 독립된 교구로 승격시킨다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브뤼기에르(한국성 ) 신부를 조선교구 초대 주교에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교회 창설 후 47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소신부가 조선 입국의 길을 찾다가 35년 뇌일혈로 급서하자 프랑스의 모방[祿] 신부가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입국에 성공하였고, 뒤이어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여 전교에 힘썼다. 이때 나신부는 외방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토착인 성직자 양성에 착안하고 최양업(), 최()프란체스코, 김대건() 등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 로마 인류복음화성성[] 동양경리부에서 학문을 닦게 하였으니 이들은 조선시대에 해외로 보내진 최초의 유학생이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서양학문을 배운 선각자들이었다.

37년, 로마 교황청은 중국 쓰촨성[]에서 전교 중이던 앵베르[] 신부를 조선교구의 제2대 주교로 임명하여 그가 이듬해 정월 무사히 입국함으로써 조선교구 창설 7년 만에 비로소 주인을 만나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김조순()은 천주교에 대하여 관대하였으므로, 그들 세 신부는 열심히 전교하여 2,000명 가까운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전국의 교인수가 9,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조순이 죽고 풍양조씨()가 세력을 잡자 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118명이 체포되고, 그 중에서 정하상 ·유진길()을 비롯한 69명이 순교하였으며, 이때 외국인 신부 범주교 ·정신부 ·나신부 등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가장 큰 일을 이룩한 순교자는 정하상이었다. 그는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잡힐 것을 예상하고 <상재상서()>의 글을 우의정 이지연()에게 올렸다. 이 글에서 천주교가 조금도 그릇된 교가 아님을 역사적으로 변호하고 주자학의 허례허식을 논박하였는데, 이 글은 87년 홍콩에서 책자로 간행되어 중국 전교에도 사용되었다.

한편, 마카오로 유학하였던 김대건은 44년 부제()가 되고 이듬해 조선교구 제3대 주교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상하이[]에서 신품성사()를 받고 신부가 되었다. 같은 해 그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어렵게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700여 명에게 성사를 주었고 교우의 수는 갑자기 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페레올 신부의 명령으로, 앞서 함께 유학을 떠났던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를 맞이하러 연평도에 갔다가 체포되어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에서 순교하고 현석문() 이하 20여 명이 잡혀 그 중 9명이 처형되었다.

로마 교황청은 1925년 한국 순교자 79명을 시복()하였다. 철종()시대에 이르러 천주교는 보호받아 교세를 크게 떨쳤으며 베르뇌[] 신부를 비롯한 10여 명의 신부가 내한하고 최양업도 신부가 되어 귀국하였는데, 그는 전국의 3,700여 명에게 영세를 주었다. 그러나 철종이 죽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원군이 집정하자, 다시 병인()박해를 일으켜 1871년까지 근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 외국 함선의 내침으로 박해를 거듭 겪어오다가 86년 한 ·프랑스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가까스로 전교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리하여 용산신학교의 개설, 성 바오로수녀회의 진출, 성서 활판소를 개설하였고, 98년에는 명동 대성당의 축성식을 올렸다. 1900년 전국에는 프랑스 성직자 40명, 한국인 신부 12명, 41곳의 성당과 4만 2000명의 신자가 있어 그 교세가 제주도에까지 퍼졌는데, 1901년 제주도에서 다시 한 번 박해를 겪어 700여 명의 교인이 희생을 당하였다.

이같이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도 가톨릭교는 발전을 거듭하여 일제강점기 말기인 41년에는 9개 교구와 169명의 외국인 신부, 139명의 한국인 신부, 18만 명의 신자로 증가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8일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일어 사용이 강요되고 일본식 이름으로의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는 한편, 각 교구의 외국인 성직자를 가두었다가 미국인 성직자는 본국으로 추방하고 기타 성직자들은 행동을 감시하였다. 42년 서울 교구의 라리보 신부가 그 직책을 노기남() 신부에게 넘기고 은퇴하자, 노신부는 교황청 지시에 따라 평양과 춘천교구장도 겸임하였다. 같은 해 12월 노신부는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주교 임명장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주교가 되었고, 43년에는 홍용호() 신부가 평양교구장이 되어 이듬해 성성식()을 가졌다. 한편 일제는 대구와 광주교구에 일본인 신부를 임명하고 각 성당들을 병사()로 사용하는가 하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한국인 신부들을 구속하는 등 온갖 횡포를 자행하다가 8 ·15광복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국토가 양단되고, 북한 지역은 공산집단에 의해 종교 자체가 말살되면서 이 지역 천주교는 또다시 큰 박해를 받았다. 각 교구의 주교를 비롯하여 신부 ·수사() ·수녀가 모조리 체포되고, 수많은 교인이 수난을 당하는 한편, 성당 ·수도원 ·신학교 ·병원 등의 시설은 모두 몰수하여 그들의 기관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50년 6월 25일 남침을 자행한 북한군은 미처 피난가지 못한 남한 지역의 성직자 ·수도자를 납치하여 갔으며, 성당 ·학교 등은 파괴되고 많은 평신도가 희생당함으로써 한국 천주교 사상 마지막으로 여겨지는 박해를 겪어야만 했다. 6·25전쟁 후 북한지역의 천주교는 거의 그 명맥을 잃었고 교인들도 자신이 교인임을 표면에 내세우지 못하는 비참한 환경에 처하였다. 반대로 남한지역의 천주교는 54년, 6개 교구에 교인수 18만 9000명에 불과하던 것이 94년 12월 현재 15개 교구에 교인수 334만 명이라는 큰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성직자도 대주교 2명(한국인), 주교 18명(한국인 16, 외국인 2), 한국인 신부 2,072명, 외국인 신부 210명, 수사() 한국인 496명, 외국인 21명, 수녀 한국인 6,632명, 외국인 212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이들이 운영하고 있는 문화 ·복지사업도 유치원 230, 초등학교 6, 중학교 26, 고등학교 36, 대학 10, 대신학교 6, 기타 특수학교 19곳에 이르고 있으며, 그 밖에 병원 ·의원 36곳, 종합복지기관 270곳 등을 운영하고 있다.

1969년에는 서울대교구의 대주교 김수환()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68년에는 100년 전 병인박해에서 순교한 근 1만 명의 신도 중에서 24위에게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함으로써 한국의 복자위()는 모두 103위가 되었는데, 83년 9월 로마 교황청은 이들 복자를 다시 성인()으로 승품시켰고, 84년 5월 로마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서울식전에서 이들 복자위 성인 승품식을 친히 집전하였다. 이어 88년에는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였다.

 

        

 

                                                  [출처-네이버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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