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먼저 경제와 매우 친하여 권세가 대단했던 경제의 누이 장공주의 딸과 유철을 혼인시킨 뒤, 장공주와 힘을 합쳐 황태자와 그의 모친 율희를 모함해 결국 황태자가 폐위되고 얼마 후 자살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경제와 사이가 좋았던 경제의 동생 양왕 역시 함정에 빠트려 황위 계승 후보에서 탈락시켰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유철에게 옥좌가 돌아갈 수 있었다.
한무제는 즉위 당시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소년이었으나, 즉위 직후 널리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대책을 묻고, 여기에 응한 동중서의 대책을 채택함으로써 유교를 중국의 국교로 만드는 길을 열었다.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은 본래 서민 기질, 무인 기질이 두드러져 유학자들을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진나라의 혹독한 정치와 초-한대전의 후유증에 시달려 기진맥진해 있는 백성들을 달래려면 도교의 자유분방함이 좋다고 여겼다. 그래서 한나라는 원래 도교(정확히 말하면 전설상 인물인 황제 신앙과 결부된 황로학(黃老學))를 존중하는 왕조로 출발해서 그때까지 이어져 왔다. 하지만 무제는 유교를 대신 내세우려는 의지가 강했는데, 천하에 두루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고 통치권력을 체계화하려면 유교가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을 본받아 사상 통제를 할 필요성도 느꼈는데, 다만 지나치게 엄격한 법가보다는 더 온건하고, 지나치게 느슨한 황로학보다는 더 질서정연한 유교가 알맞아 보였다.
이는 단순히 사상의 문제만도 아니어서, 어린 황제가 유교를 진흥하려 한다는 말이 퍼지자 황로학을 받드는 무리가 무장을 한 채 대궐 문 앞에 새까맣게 모여 소요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 황로학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무제의 할머니, 두태후가 손자의 ‘철없는’ 행동을 바로잡겠다고 나섰다. 무제는 할 수 없이 유교의 국교화를 늦출 수밖에 없었으나, 그런 반발은 유교를 기필코 진흥하겠다는 그의 결심을 굳혀 주었다. 신하들이 감히 황제의 명령을 정면으로 치받는다거나, 아무리 태후라도 여자가 정치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일은 유교의 가르침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기원전 135년에 두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무제는 지체없이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최초의 유교식 학교인 명당(明堂)과 태학(太學)을 건립하는 등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두태후의 일족을 숙청하고, 황로학을 따르는 나이든 대신들도 새롭게 갈아치우며 조정을 본격적으로 장악해갔다. “하나로 통일된 대제국”으로서의 중국은 진시황이 처음 틀을 잡았지만, 그 대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유교를 받드는 전통은 한무제가 시작한 것이었다.

고비사막에서 대동강까지
 그러나 무제가 무제(武帝)라 불리는 이유는 그가 외치(外治) 쪽에서 거둔 눈부신 업적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중국의 북방에는 흉노라는 막강한 위협 세력이 있었다. 통일 제국인 한나라도 이를 감당하지 못해, 한고조 시절에 정벌하려다 그만 거꾸로 포위를 당한 끝에 겨우 풀려난 이후로는 매년 거액의 뇌물을 바치거나 황실의 여자를 보내는 일로 그들의 침입을 달래 오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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