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

낙산사 창건이야기

띨빡이 2009. 10. 7. 21:34

금강산, 설악산과 함께 관동 3대 명산의 하나로 손꼽히는 오봉산 자락에 자리 잡은 낙산사.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양양군 전진리 55번지에 위치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음도량인 낙산사는 2005년 4월 화재로 불타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창건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관세음보살 주석처인 홍련암만 화마가 비켜가 관세음보살 영험도량임을 실감하게 했다.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풍광을 자랑하는 낙산사는 부처님진신사리가 출현한 공중사리탑, 보물로 지정된 건칠관음보살좌상,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상, 천수관음상 칠관음상이 봉안돼 있어 관음성지이자 천년고찰로 전 국민의 정신적인 신앙지가 되고 있다. 숱한 영험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낙산사에는 창건과 관련해 의상스님과 원효스님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사진> 낙산사 일주문 옆의 관음송. 원효스님이 만난 여인이 관세음보살님이었음을 알려준 파랑새가 소나무에서 날아온데서 관음송이라 불린다.

    

    

낙산 두 성인,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다

 

의상스님, 관음굴서 수정염주 받아 사찰 건립

원효스님, 여인으로 변신해 온 관음보살 만나 

   


 낙산사 창건역사의 중심지인 홍련암. 2005년 대형화재에도 불타지 않아 기도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홍련암 법당에서 내려다 본 관음굴.

 

중국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지엄문하에서 화엄교학을 완성한 의상스님은 670년(문무왕 10)에 귀국해 경주에 머물렀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신라에도 관세음보살 진신이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라에도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고? 그렇다면 그곳에 가서 나도 한번 기도해 관세음보살님을 만나봐야겠어.”

의상스님은 관음보살이 머문다고 알려진 낙산(현재 양양 오봉산 낙산사)을 찾아 기도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곳에는 동해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고 파도가 밀려 왔다 갔다 하면서 형성된 곳에 깊은 굴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 이곳은 충분히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할 수 있는 곳이야. 서역에서는 이런 곳의 산을 보타낙가산이라 부르지. 이곳 이름을 소백화(小白華)라고 불러야겠어. 흰옷을 입은 관세음보살님인 백의대사(白衣大士)가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지.”

의상스님은 그 곳에 초막을 짓고 일념정진에 들어갔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기도소리는 끝없이 이어졌고 그 소리는 하늘과 땅, 바다로 널리 퍼져나가 그 위신력에 의해 곧 감응이 올 것만 같았다. 이어 좌선삼매에 들어간 의상스님은 무념의 경지에 들어갔다. 주변에서 함께 수행하던 스님들은 스님의 놀라운 정진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큰스님은 지금 완전히 삼매에 들어갔어. 그러니 우리는 큰스님 곁을 잘 지켜야 한다고.”

예상은 딱 맞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3일, 4일, 5일, 6일이 지났다. 7일째를 맞이한 의상스님은 좌선삼매에서 깨어났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시자들이 스님을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스님은 시자들에게 오지 말라는 말을 손짓으로 하며 접근을 하지 못하게 했다.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얼굴에 연꽃미소가 막 피어오를 듯한 모습을 한 의상스님은 자신이 깔고 앉아 있던 좌구(坐具)를 들고 바닷가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바다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러자 신비한 이적이 일어났다.

“아니, 큰스님의 좌구가 바다에 가라앉지 않고 둥둥 떠 있어. 저기를 보라구.”

주변 스님들이 깜짝 놀라 하늘을 쳐다보니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장인 용천팔부(천룡팔부)가 의상스님의 주변을 호위하고 있었다. 마치 의상스님은 양탄자를 탄 신선 같아 보였다. 용천팔부는 의상스님을 바닷가 굴속으로 모시고 스스륵 들어가 버렸다. “큰일 났다. 용천팔부가 우리 큰스님을 굴속으로 납치해 버렸어. 어떻게 하지?”

시자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굴 속에 들어간 의상스님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다. “오시었소, 스님. 당나라에 가서 법을 구하셨으니, 이제 신라에 불법을 융성하게 하셔야지요. 내가 여기 수정염주(水精念珠)를 드릴 테니 가지고 가서 더욱 정진에 임하세요.” 신비한 구슬을 선사받은 의상스님은 용천팔부의 호위를 받으며 굴 밖으로 나와 7일 동안 정진에 들었다. 다시 스님은 용천팔부가 인도를 받아 굴속으로 들어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다.

“잘 오시었소, 대사. 그대의 법력은 과히 신라에 불법을 흥성하게 할 자격이 있고도 남을 듯하오. 잠시 후 스님이 수행하시던 산 꼭대기에는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날 것입니다. 그곳에 불전을 건립하세요.”

의상스님은 환희심이 일어났다. “예, 관세음보살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극한 예를 올린 의상스님은 용천팔부의 호위를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과연 산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났다. 스님은 그 자리에 금당(金堂)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부처님 상호는 마치 하늘이 내려온 것 같이 온화했다.

불전을 모시자 대나무는 곧 사라졌다. 의상스님은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이 그 곳에 머물다 간 것임을 확연히 깨달았다. 그래서 의상스님은 사찰 이름을 ‘낙산사’로 정하고 자신이 받은 수정염주 2개를 불전에 모셨다.

일설에는 의상스님이 낙산에서 수행하다가 파랑새를 만났는데, 그 새를 따라 굴속으로 들어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다고 한다. 그때 붉은 연꽃이 피어올랐는데 그 자리에 ‘홍련암’을 창건했는데 낙산사의 모태사찰이 됐다고 한다.

두 이야기는 모두 의상스님 지극한 기도로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한 부분이 일치해 결국 유사한 이야기로 분류할 수 있다. 앞의 두 설화의 중심지는 모두 현재의 홍련암이며 요즘도 홍련암에 가면 관세음보살이 다녀갔다는 관음굴을 법당 바닥에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볼 수 있다.

그 후 원효스님도 의상스님이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관음보살의 자취를 찾아 낙산에 이르렀다. 낙산 남쪽에 도착한 원효스님은 논에서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벼를 베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스님은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 보오. 그 벼를 내게 좀 주시겠소?”

그러자 여인은 “잘 영글지 않아 드릴 게 없습니다”라며 농담조로 대답했다. 원효스님은 다시 길을 가다가 한 여인을 또 만났는데 이번에는 다리 아래 냇물에서 월수백(月水帛, 생리대)을 빨고 있었다.

“이 보시오. 내가 목이 마르니 물 한 모금 떠 주시겠소?”

그러자 여인은 빨래하던 혼탁한 물을 떠서 바쳤다. 원효스님은 어찌 더러운 물을 마실 수 있을까 싶어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깨끗한 물을 떠서 마셨다. 그때 들판 한 가운데 소나무위에 앉아 있던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와 원효스님에게 대뜸 말했다.

“휴제화상(休醍和尙-원효스님을 지칭)은 그만 두세요.”

그리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소나무 아래에는 방금 만났던 여인의 신발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원효스님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낙산사에 도착해 관세음보살님이 앉아 있는 자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조금 전에 만났던 여인의 신발 한 짝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까 만난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님이었단 말이구나!”

그리하여 낙산사의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원효스님은 의상스님이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다는 관음굴을 들어가려 했으나 풍랑이 일어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양양=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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