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역사 외

강희제-네이버캐스트

띨빡이 2009. 9. 14. 22:26


하나. 아르군강과 고르비차강, 그리고 대흥안령(스타노보이 산맥)을 경계로 동쪽은 중국의 영토이며, 서쪽은 러시아의 영토이다. (…) 둘, 흑룡강에 접하는 아르군강을 경계로 남쪽은 중국, 북쪽은 러시아의 영토이다. (…) 다섯, 과거의 갈등은 일체 불문에 부친다. 각자의 나라에서 정당한 업무활동을 하는 양국인은 추방당하지 않는다. 여섯, 양국은 영구적인 평화를 이룩하며, 앞으로 국경을 넘는 사람은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 ……

 

1689년 여름에 시르카강 강변의 작은 마을인 네르친스크에서 청나라와 러시아가 맺은 조약은 모두 8개조로 이루어졌고, 내용은 두 나라의 국경을 확정하며 영토 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조약이 날인되고 나자 곧바로 러시아어, 만주어, 한문, 라틴어로 쓰인 조약문을 새긴 비석이 국경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땅에 마주 보고 세워졌다. 8개조에 지나지 않는 짧은 조약문이었으나 그 의미는 컸다. 러시아로서는 수백 년에 걸친 동방으로의 영토 확장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은 것이었고, 청나라의 강희제는 자신이 즉위한 뒤로 수십 년이 넘도록 고민해온 숙제를 해결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17세기 초부터 극동에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고, 당시는 명왕조와 청왕조의 교체기로서 중국에 그 움직임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러시아는 흑룡강 유역의 알바진을 근거로 흑룡강 일대를 장악하려 들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밀어붙이는 틈틈이 러시아인을 격퇴하기 위한 전투를 치렀으나, 만주 지역에 파고든 세력을 쫓아내는 정도였고, 흑룡강 북부와 몽골의 거점에서 그들을 격파하지는 못했다.

 

강희제가 즉위하던 무렵 중국도 점차 안정되면서 몽고 쪽의 네르친스크를 공격해 빼앗고, 다시 흑룡강 북부를 공략하는 등 청나라의 공세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다시 ‘삼번의 난’이 일어나고, 중앙아시아나 대만 쪽에서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기에 러시아와의 싸움에 전력을 투입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강희제는 먼저 막강한 무력을 과시한 다음,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하여 1682년부터 군량미 수송로를 만들고 병사들에게 특별훈련을 시키는 등 착착 전쟁 준비를 한 끝에, 1685년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5월에 러시아군의 본거지인 알바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청군은 애써 알바진을 점령하고는 곧바로 후퇴해 버린다. 러시아가 다시 이곳을 손에 넣자, 이듬해에 다시 맹공격을 해서 알바진의 러시아군을 거칠게 몰아 붙인다. 그러자 러시아는 비로소 협상에 응할 의사를 전해 왔다. 이후 밀고 당기는 협상이 지루하게 진행된 끝에, 1689년 8월에 가서야 “러시아는 오랜 극동 공략의 근거지인 알바진을 포기한다. 대신 청나라도 네르친스크 일대에서 손을 뗀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국경 조약을 맺게 된다. 청나라는 본래 너무 춥고 거친 북녘 땅까지 넘볼 뜻이 없었다. 단지 시아가 만주와 화북 지방까지 남하하는 것을 저지하기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네르친스크 조약은 만족스러운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국제조약은 중국 역사에서 볼 때 매우 생소한 것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하늘 아래 모든 땅은 황제의 것이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중국 황제의 영향권 밖에 있는 나라들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땅이 멀고 풍속이 달라서 ‘자치권’을 주고 있음에 지나지 않으며, 로마 황제든 투르크의 술탄이든 중국 황제의 ‘신하’일 뿐이라는 게 중화사상이었다. 하지만 네르친스크 조약문을 보면 완전히 대등한 두 나라가 상대방의 주권을 존중하며 맺어진 협약처럼 보인다. 애초에 모든 땅이 황제의 땅인데, ‘국경선’을 정하고, 중국인이 러시아 국경을 넘을 때 ‘여권’을 제시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는 중국 사상 최초의 국제평등조약이며, 그것은 한족이 아니라 만주족 정복왕조인 청나라라서 가능했다고들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당시의 중국 황제가 다름 아닌 강희제였기에 그런 조약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강희제는 항상 “극단을 이해하고, 중심을 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왕들과는 달리 유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중국 문화에 심취했지만, 그것에 지나치게 빠진 나머지 동이(東夷)의 정체성을 잃지도 않았다.

 

 


강희제는 이처럼 상반되는 듯한 두 가지 성향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중도를 잃지 않았던, 보기 드문 군주이자 보기 드문 인간이었다. 그는 너무 열심히 책을 읽다 피를 토할 만큼 공부벌레이면서 사냥에 나가면 앞장서서 말을 달리며 호랑이를 쏘아 죽이는 용맹을 자랑하기도 했다. 동양 문화를 넓고 깊이 이해하면서 수학, 천문학, 라틴어 등 서양 학문 역시 두루 익혔다. 신하들의 작은 실수를 관대히 넘기고 과감히 권한을 위임하는 한편, 70세에 가까워서도 상소문을 꼬박꼬박 읽으며 원칙에 어긋난 일 처리는 매섭게 꾸짖으며 바로잡곤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타고난 재능이 남다르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왕조의 주춧돌을 세워야 하는데다 소수의 만주족으로 다수의 한족을 통제하며 야심만만한 대신들, 지방의 세력들, 여러 이민족들의 도전에 맞서 제국을 운영해 나가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통감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이를 수행해 나갔기 때문이리라.

 

1654년 5월 4일, 순치제의 아들로 태어난 강희제는 여덟 살 때 부황의 죽음과 함께 제위를 계승했다. 당연히 어린 나이로 직접 정치를 할 수는 없었고, 오보이, 소닝, 에비룽, 스쿠사하의 4인이 보정대신이라는 이름으로 섭정을 했다. 그러나 곧 문제가 불거졌는데, 처음에는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협력하며 국정을 운영하던 이들이 곧 두 패로 갈라져 싸우게 되고, 조정 전체도 오보이파와 스쿠사하파로 나뉘어 으르렁거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승리자가 된 오보이는 사실상 황제처럼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며 온갖 무도한 짓을 다했다. 강희제는 어린 나이임에도 이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일로 여기며 절치부심했다.

 

하지만 섣불리 일을 추진하면 오히려 자신이 당할 것을 알고, 오보이를 볼 때면 늘 웃는 낯으로 대하며 ‘철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유지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자기 또래의 소년들과 모여서 노는 것을 빙자해 은근히 무예를 익히고 그 소년들을 자신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결사대로 키워냈다. 그리하여 1669년, 혼자 입궐하던 오보이를 기습해 붙잡은 뒤 그동안 조사한 오보이의 온갖 월권과 배임 행위를 낱낱이 고발하고, 대표적인 오보이파 신하들을 조정에서 쓸어냈다. 마침내 명실공히 천하의 주인이 된 강희제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오보이를 제거했다고 마음 놓을 수는 없었다. 당시 청왕조는 일단 중국을 통째로 지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화북과 양자강 하류 쪽만 비교적 확실하게 지배했다. 화남의 대부분은 운남의 오삼계, 광동의 상가희, 복건의 경중명, 즉 이른바 ‘삼번(三藩)’을 비롯한 지방세력들이 명목상으로만 청의 통치권을 인정하며 제각기 할거하는 처지였다. 특히 명왕조의 유력한 군벌이었던 오삼계는 남방무역을 독점하고 티베트와도 연계하여 세력이 실로 막강했다. 천하가 태평해지려면 삼번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 강희제는 1673년, 먼저 광동의 상가희의 번왕 지위를 박탈하고 그 지역을 직접 통치하는 ‘삭번(削藩)’에 들어갔다. 그러자 오삼계는 ‘반청복명’을 내세우며(그가 청나라에 항복하고 명왕조 최후의 희망이라는 계왕을 살해함으로써 명-청 교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보면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나) 다른 번국과 티베트의 달라이라마, 대만의 정성공을 비롯한 복명회 세력 등과 합세해 대규모의 반란에 나섰다. 강희제는 이에 맞서 친히 병력을 이끌고 최전선에서 반군과 부딪혔으며, 병사들과 함께 먹고 자며 진압에 최선을 다했다. 치열한 전쟁은 8년이나 끌어, 1681년에 운남 왕부가 함락되면서 겨우 일단락되었다.  

 

 

삼번의 난이 마무리된 후에도 이민족에게 지배당한다는 민족적 반감을 이용한 반란의 움직임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강희제는 무엇보다 한인 관료들과 사대부들의 존경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명왕조 시대에는 형식화되었던 경연 제도를 일신하여 매일처럼 신하들과 유교 경전을 읽고 토론했으며, 싸움터에서든 사냥터에서든 틈만 나면 책을 읽으며 학식을 쌓았다. 서양 학문을 익히게 된 동기도 실용적, 그리고 정치적이었다. 삼번의 난 등에서 서양의 보다 앞선 화포 기술을 도입할 필요가 있었고, 또 전통적으로 황제의 역할 중 하나였던 ‘올바른 역법을 내려 주는 일’에서 서양 역법이 전통 역법보다 더 정확함이 드러났기에 서양 선교사들을 가까이 두고 그들의 지식을 탐구하게 되었다. 황제로서는 유교 지식의 수준이 단연 뛰어났지만, 그래도 일부 학식 높은 신하들을 당할 수는 없던 강희제는 때때로 신하들의 기를 죽이고자 서양에서 빌린 지식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강희제의 남다른 점은 그처럼 정치적 필요에서 비롯된 일이라도 어디까지나 성심을 다해 임했다는 데 있다. 단지 보여주기 위한 공부라면 그렇게 성실할 필요는 없건만, 강희제는 서양 역법과 수학 공부를 시작한 다음 보다 철저히 공부하기 위해 서구인들도 배우기 힘들다는 라틴어까지 익혔다.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열의도 학구열에 불타는 젊은 유생들 이상이었다. 그는 천하가 태평해지고 조정이 안정된 지 오래되었을 때도 “성군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백성에게 보다 도움이 될까” 등의 질문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지곤 했다. 그는 62년이나 재위했는데 중국 사상 가장 오래 다스린 기록이었다. 보통 통치 기간이 길다 보면 정치에 신물이 나고, 안이함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불필요한 사업을 벌이거나 엽기적인 취미를 쫓느라 국정을 등한시하게 된다. 초기에는 성군이라는 말을 들었던 양무제나 당현종 등도 그런 예다. 하지만 강희제는 마지막까지 초심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늘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죽기까지 힘쓴다는 말이 자신의 마음가짐이라고 밝혔다. 어떤 신하가 본래 제갈량의 <후출사표>에 나오는 이 말이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자세를 가리키며 임금이 가질 자세로는 어울리지 않다고 지적하자, 강희제는 조용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짐은 하늘을 섬기는 신하다.”

 

그의 이러한 진정성이 사람들에게 전해졌기에, 초반의 큰 반란들이 진정된 후로는 오랫동안 태평성대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강희제 시대에 비로소 만주족 왕조가 한족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3백년 가까이 이어질 기반을 닦지 않았을까. 강희제에게 감동한 사람들 중에는 서양 선교사들도 있었다. 부베나 히버트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하나같이 보고서나 회고록에서 강희제를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찬양하고, 자신이 만나본 어떤 유럽 군주보다도 뛰어나다고 했다. 강희제는 서양 학문을 열심히 배우면서도 끝까지 천주교로 개종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선교사들이 그만큼 칭찬했음은 매우 특별한 경우다.

 

 

진정 이상적인 군주에 가까웠던 강희제였지만 그에게도 그늘은 있었다. 먼저 두 토끼를 모두 놓치지 않으려다 보니 당연히 몸과 마음이 괴로웠다. “역대 황제들 중에서 간혹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을 두고 역사책에는 지나친 방탕에 빠져 기력이 쇠했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직접 경험해 보니 알겠다. 방탕해서 그랬다기보다 정무를 보는 일이 너무 힘들고 벅차 수명이 짧아진 것이다.” 어느 편지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신하는 늙으면 박수를 받으며 은퇴하건만, 짐은 은퇴할 수도 휴가를 보낼 수도 없구나.”라며 한탄하기도 했다. 보다 큰 문제는 후계자 문제였다. 본래 청왕조는 만주족의 전통에 따라 황제가 죽으면 종친과 대신들이 모여 새 황제를 뽑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열심히 공부한 유교적 전통과 다르고, 황제의 후계자 선출권을 무시한다고 본 강희제는 적장자를 황태자로 세우는 중국식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황태자 제도의 문제점은 ‘차기’가 일찍 정해지면서 황제와 황태자 사이에 묘한 권력적 긴장관계가 생긴다는 데 있다.

 

강희제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1676년에 뽑은 황태자 윤잉은 20대가 되며 부황이 이룩한 평화와 권한 덕분에 방탕한 생활을 구가했고, 부황의 자리까지 은근히 넘보았다. 태자의 끄나풀이 자신의 침소까지 매일 엿보며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강희제는 결단을 내려, 1708년에 윤잉을 폐태자하고 그 수족들을 처벌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차기 태자를 노리는 황자들끼리의 분쟁이 일어났다. 그 추잡함에 질린 강희제는 1년 뒤 윤잉을 다시 태자로 삼았는데, 윤잉이 반성할 줄 모르고 예전의 비리를 거듭했기에 3년여 뒤 다시 폐태자를 시키고 만다. 그리고 황태자 제도를 포기하고는, 죽을 때까지 후계자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밀지를 통해 차기 황제를 정했다. 그런데 여기에 조작이 가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강희제는 본래 ‘십사(十四) 황자’라고 밀지에 적었으나, 누군가 십(十) 자에 가필을 해서 제(第) 자로 변조, ‘제4(第四) 황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옹정제가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말이 있다. 

 

 

날로 쇠퇴하는 기력, 후계자 문제, 그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완전히 하나로 합치지 못하는 만주족과 한족(그는 학문을 장려하고 형벌을 최소화하려는 입장이었지만, 명왕조를 그리워하는 내용의 글과 그 글을 쓴 자에게는 냉혹한 탄압을 가해야 했다). 노년의 강희제가 남긴 글을 보면 많은 괴로움을 안고 생의 마지막을 보낸 듯하다. 강희제는 최후까지 나랏일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심신이 쇠하다 보니 말년에는 ‘쓸데없는 참견’을 일삼거나 간사한 신하들의 꾀에 넘어가거나 하는 일이 잦았다는 분석도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임금이란 누구나 원하는 자리, 뭐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자리다. 그러나 그 자리에 부과된 책임을 진심으로 성실히 수행하려 한다면, 그처럼 고독하고 힘든 자리도 없으리라.

 

그래도 강희제는 행복한 편이었다. 군주의 자리가, 그리고 유학의 정치철학이 강요하는 무미건조함 속에서 한 가닥의 인간성을 오래 간직할 수 있었으니까. 그가 외적을 격퇴하러 멀리 고비사막을 원정할 때, 은밀히 후궁에 보낸 편지를 보면 “이곳 특산 참외를 얻었소. 맛이 제법 뛰어나기에 인편에 보내오.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먼 곳에서 보내니 비웃지 말기를.” 이런 구절이 있다. 절대권력을 가진 황제가 긴박한 전쟁터에서 후궁의 여인을 떠올리는 순박한 마음. 그러면서 혹시 ‘뭘 이런 걸 보냈담’ 하며 비웃지나 않을지 하고 조바심 내며 수줍어하는 마음, 특별하지 않은가? 당시 강희제는 아직 40대였다. 그러나 이처럼 인간적인 마음을 유지했기에, 그 잔혹한 자리에서 그토록 오래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강희제를 이은 옹정제는 부황은 너무 한족에게 치우쳤다고 생각하고, 만주족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정책을 추구했다. 그 다음의 건륭제는 강희제를 매우 존경했으나, 그의 가르침을 확실히 새기지는 않았나 보다. 무역을 청하는 영국 사절을 신하 취급하며 “중국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너희와 무역할 필요 따위는 없다. 너희를 만나 주는 것은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고 대답했다니까. 그 말은 당시로서는 사실에 가까웠다. 하지만 자족하는 자는 발전하지 못한다. 낯선 나라 러시아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었던 강희제, 새로운 문화에 혼을 빼앗기지 않으면서 그 장점을 고루 취할 줄 알았던 강희제를 본받았다면, 그처럼 안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약 70년 뒤, 서양 열강의 압박에 시달리며 강희제가 확보했던 외흥안령 남쪽의 땅(연해주와 아무르주)을 러시아에 허무하게 빼앗기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