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는 이처럼 상반되는 듯한 두 가지 성향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중도를 잃지 않았던, 보기 드문 군주이자 보기 드문 인간이었다. 그는 너무 열심히 책을 읽다 피를 토할 만큼 공부벌레이면서 사냥에 나가면 앞장서서 말을 달리며 호랑이를 쏘아 죽이는 용맹을 자랑하기도 했다. 동양 문화를 넓고 깊이 이해하면서 수학, 천문학, 라틴어 등 서양 학문 역시 두루 익혔다. 신하들의 작은 실수를 관대히 넘기고 과감히 권한을 위임하는 한편, 70세에 가까워서도 상소문을 꼬박꼬박 읽으며 원칙에 어긋난 일 처리는 매섭게 꾸짖으며 바로잡곤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타고난 재능이 남다르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왕조의 주춧돌을 세워야 하는데다 소수의 만주족으로 다수의 한족을 통제하며 야심만만한 대신들, 지방의 세력들, 여러 이민족들의 도전에 맞서 제국을 운영해 나가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통감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이를 수행해 나갔기 때문이리라.
1654년 5월 4일, 순치제의 아들로 태어난 강희제는 여덟 살 때 부황의 죽음과 함께 제위를 계승했다. 당연히 어린 나이로 직접 정치를 할 수는 없었고, 오보이, 소닝, 에비룽, 스쿠사하의 4인이 보정대신이라는 이름으로 섭정을 했다. 그러나 곧 문제가 불거졌는데, 처음에는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협력하며 국정을 운영하던 이들이 곧 두 패로 갈라져 싸우게 되고, 조정 전체도 오보이파와 스쿠사하파로 나뉘어 으르렁거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승리자가 된 오보이는 사실상 황제처럼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며 온갖 무도한 짓을 다했다. 강희제는 어린 나이임에도 이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일로 여기며 절치부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