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6월 22일
성요한 피셔 주교 순교자
ST. JOHN FISHER
St. Joannes Fisher. E. M
San Giovanni Fisher Vescovo e martire
Born:1469
Died:martyred on 22 June 1535 on Tower Hill, London, England;
buried in the churchyard of All Hallows, Barking, without rites or a shroud;
head exhibited on London Bridge for two weeks as an example, then thrown into the River Thames
Canonized:1935 by Pope Pius XI
Giovanni = il Signore è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요한 피셔는 보통 에라스무스,토마스 모어, 그리고 다른 문예 부흥기의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언급된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일부 성인들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겉보기에도 그리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당시의 지성인들이나 정치가들과 교제한 학자였다.
그는 당시의 문화에 관심을 가졌으며 나중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그는 35세에 로체스터의 주교가 되었으며 그의 특별한 관심 중의 하나는 영국의 설교 수준을 높이는 것이었다.
피셔 자신은 완벽한 설교가였고 저술가였다.
참회 시편에 관한 그의 설교는 그가 죽기 전에 일곱 번이나 재판에 회부되었다.
루터파의 등장과 더불어 그는 이단과의 논쟁에 휩싸였다.
그가 이단을 반박하기 위해 쓴 8권의 책은 그로 하여금 유럽 신학자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갖게 해주었다.
1527년에 그는 헨리 8세와의 이혼과 재혼을 반대하고 그리고 후에는 헨리 8세가
영국 교회의 최고 책임자라는 주장을 거부함으로써 헨리8세의 분노를 샀다.
그를 제거하기 위한 첫 시도로 헨리 8세는 켄트의 수녀인 엘리사벳 바튼의 "계시"를 모두 보고하지 않았다고 그를 고발하였다.
몹시 허약해진 그는 새로운 계승 문서에 서약하도록 소환되었다.
그와 토마스 모어는, 이 문서와 다른 내용들이 헨리 8세의 이혼이 합법적이라는 것과
헨리 8세가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주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 서약을 거부했다.
그들은 런던탑으로 보내졌고 피셔는 그곳에서 재판도 받지 않고 14개월 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그들은 결국 종신형을 언도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 두 사람은 더 많은 심문에 소환되었으나 계속 침묵을 지켰다.
피셔는 한 사람의 사제로서 사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는 계교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왕은 영국 교회의 최고 책임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교황이 옥중의 피셔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자 더욱 화가 난 왕은 그를 반역죄로 재판에 부쳤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으며 그의 몸은 하루 종일 처형대에 뉘어 있었고
그의 머리는 런던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토마스 모어는 그로부터 2주일 후에 처형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사제들이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요한 피셔는 주교로서 자기 소명에 충실했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고수하였다.
그가 순교한 이유는 바로 로마 교황청에 대한 그의 충성심때문이었다.
그는 그 시대의 문화적 계몽 단체나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에 모두 참여하였다.
이러한 참여는 그로 하여금 그 나라 지도자의 윤리적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인간의 기본 권리나 인류의 구원 그 자체에 필요하다면 교회가 사회적,국가적,국제적 차원에서
정의를 선포하고 불의한 일들을 고발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1971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세상에서의 정의")
에라스무스는 요한 피셔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정직한 생활,뛰어난 학문,위대한 영혼에 관한 한 이 시대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인도 다수 배출하고 원래는 가톨릭 국가 중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이
16세기에 이르러 한 국왕의 실수로 이단의 도가니로 휩쓸려 들어가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그때 그리스도교의 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모든 계급에서 왕의 무지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훌륭히 신앙을 관철해 용감한 순교자를 많이 나게 한 것은 매우 기쁜일이라 하겠다.
성 요한 피셔도 역시 그러한 사람 중의 한 분이었다.
그는 1469년 요크샤 주의 베라리이 마을에서 태어나 유명한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해 신학을 배워
1501년 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그 즉시 그 대학 주사(主事)로 뽑혔다.
그는 한편 사제가 되어 많은 사람들과 특히 상류의 인사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헨리 7세 왕의 고문으로
취임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로 신임을 받고있었다.
그의 직무에 대한 열의에는 황태후도 매우 감동되어 이에 보답하는 뜻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 2학부를 증설할 비용과 수많은 학생에 대한 보조비 등을 하사할 정도 였다.
그리고 국왕은 또한 그의 공로를 생각해 1504년 로체스터의 주교좌를 그에게 주셨던 것이다.
헨리 8세가 즉위했는데, 그도 자녀가 부모를 따르듯이 피셔를 경애하며
"유럽이 넓다 해도 우리 로체스터 주교처럼 학덕 겸비한 위대한 인물은 다른데에는 없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이라 부르며 가톨릭 전래의 교회와 성사 등을 다수 폐지하자,
헨리 8세는 호교의 펜을 들어 "일곱의 거룩한 성사"라는 서적을 저술했는데,
이에도 주로 피셔 주교의 권고와 조력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를 위해 진력한 헨리 8세가 돌연 마음이 변해 교회를 배반하게 된 이유는
누구나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안나 보레인이라 하는 궁녀에 대한 사욕(邪慾)에서 발단한 것이었다.
왕은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왕후 가타리나와의 결혼이 무효였다는 것을 피셔 주교나 토마스 모어 재상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했으나 이 두 사람은 모두 정의에 강한 분이었으므로 왕의 부정한 요구를 거절하고
성심성의로 그에게 간(諫)했다.
그러나 사욕에 눈이 어두워진 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두 사람을 미워하며
드디어 그들을 런던 탑의 감옥에 가두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이미 67세의 고령에 달했던 피셔는 옥중의 고통을 인내하기를 1년, 체력이 몹시 쇠약해져
재판 받으러 나갈때에도 걸을 수가 없어 테임즈 강 위를 배로 운반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였다.
그러나 정신은 조금도 쇠퇴하지 않고 고난이 심하면 심할 수록 그만큼 마음에는 열렬한 신앙의 뜨거운 불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죄목은 국왕에 대한 배반이란 것이었다. 재판관이 "그대는 그 죄를 인정하는가?"하고 물으니
피셔는 정색을 하고 나서서 "나는 반성을 해 보아도 국왕에게 대해 불경한 행동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하고
명백히 단언하며 일일이 논고를 변박했다.
그런데 그를 사형에 처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재판은 다만 형식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피셔의 변론이 모두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사형의 선고는 드디어 그에게 내려진 것이다.
사형 집행의 명령은 1535년 6월 21일이 밤에 내렸으나 다음 날 아침 5시에야 비로소 그 뜻을 전하였던 바
피셔는 태연한 태도로 "그렇소, 고맙구려"하고 대답하고는 집행의 시간이 오전 9시라는 것을 듣자
"그러면 아직 두시간 가량 더 쉬게 해 주시오"하고 말하면서 다시 침상에 누웠다.
일곱 시에 눈을 뜨자 주교는 몸에 걸치고 있던 고복을 호화스러운 의복으로 갈아입고
형리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관리들이 모시러 오자, 그는 성호를 긋고, 복음성서를 들고 서서히 감옥을 나왔다.
사형장에 가는 도중 그 성서를 펼쳐 보니, 눈에 띈 것은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 3)라는 한 구절이었다.
그는 그것이 얼마나 자기의 현 처지에 적합한 말씀인가 생각하며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노(老)주교께서 사형대에 서게 되자 형 집행인은 옆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다.
이에 대해 그는 온순한 말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형제여,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용서합니다.
나는 죽음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으니 결코 근심을 말아주시오"라고.
그리고 나서 피셔는 단(壇)위에서 그의 덕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최후의 설교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함을 듣고 나서는 다만 자기가 신심을 위하여 죽는다는 취지만을
간단히 말하고 조국과 국왕을 위해 기도를 바치고 군중에게 고별 인사를 하고 나서 소리높이 떼 데움을 읊고
"주여, 우리는 당신을 신뢰하오니 영원히 멸망치 말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마치자 하늘을 우러러보며
팔을 벌리고 이어 참수 순교했다. 때는 1535년 6월 22일 이었다.
피셔 주교는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바오로 3세에 의해 로마 교회의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요한 피셔는 토마스 모어와 함께 1886년 12월 20일 시복되고,
1934년의 성령 강림 축일에 시성되어 영원한 영광을 획득하게 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자의 교서 성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함 QUIBUS SANCTUS THOMAS MORUS 2000. 10. 31. 영원히 기념하여
1. 성 토마스 모어의 삶과 순교는 인간 양심의 양도할 수 없는 존엄을 수세기에 걸쳐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 말해 주는 메시지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에게, 인간의 양심이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16항) 하고 상기시켜 줍니다. 인간이 진리의 외침에 귀 기울일 때마다 양심은 그들의 행동을 확실하게 선으로 이끌어 줍니다. 성 토마스 모어는 진리가 권력에 우선한다는 것을 목숨을 바쳐서沮?증언하였기 때문에 도덕적 고결함의 영원한 본보기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밖에서까지, 특히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인간에 대한 봉사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정치 제도를 위한 영감의 원천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최근에 몇몇 국가와 정부의 수반, 많은 정치 인사들, 일부 주교회의와 주교들이 저에게 성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도록 요청해 왔습니다. 서로 다른 정치, 문화, 종교에 충실한 사람들도 이러한 청원에 동조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뛰어난 정치인의 사고와 활동에 대한 깊고 광범한 관심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2. 토마스 모어는 그의 모국에서 탁월한 정치 경력을 쌓았습니다. 1478년 런던의 한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캔터베리 대주교이며 영국의 대법관인 존 모턴을 도왔습니다. 나중에 옥스퍼드와 런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면서 문화와 신학, 고전 문학 분야에 대한 관심도 넓혔습니다. 그는 그리스어에 능통하였고, 로테르담의 데지데리우스 에라스무스를 비롯하여 르네상스 문화의 주요 인물들과 교제하며 친분을 맺었습니다.
그는 순수한 신앙심을 가지고 열심히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덕을 쌓았습니다. 그리니치에 있는 프란치스코 탁발 수도회의 원시회칙파 수도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키워 나갔고, 한때는 런던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에서 살았습니다. 이 두 곳은 영국에서 종교적 열정이 넘치는 주요 중심지였습니다. 혼인을 하여 가정 생활을 하고 평신도로 헌신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느낀 그는 1505년에 제인 콜트와 혼인을 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제인은 1511년에 세상을 떠났고, 토마스는 딸 하나를 둔 미망인인 앨리스 미들턴과 재혼을 하였습니다. 그는 평생토록 다정하고 성실한 남편이고 아버지였으며, 자녀들의 종교, 도덕, 지적 교육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그의 집은 자녀들의 배우자와 손주들이 마음대로 드나들었고, 진리나 인생의 소명을 찾는 많은 젊은 친구들에게도 언제나 열려 있었습니다. 가정 생활은 또한 그에게 만족스럽고 건전한 휴식뿐 아니라 공동 기도와 영적 독서를 위한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토마스는 본당의 매일 미사에 참례하였으며, 그가 실천한 엄격한 고행에 대해서는 가까운 가족들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3. 그는 1504년 헨리 7세 치하에서 처음으로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헨리 7세의 후계자인 헨리 8세는 1510년에 그에게 위임을 갱신하였고, 그를 런던의 사정 장관보(司政 長官補)로 임명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관직에서 탁월한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뒤이어 10년 동안 국왕은 그에게 여러 차례 외교와 통상 임무를 맡겨 플랑드르와 오늘날의 프랑스 영토에 보냈습니다. 그는 칙선 법정 변호사단의 일원으로 중요한 법정의 재판을 주재하였고, 왕실 회계국 부장관과 주(州) 선출 대의원을 지냈으며, 1523년에는 하원 의장이 되었습니다.
변함 없는 도덕적 고결함, 영민한 정신, 개방적이고 재치 있는 성격, 출중한 학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던 그는 영국이 정치, 경제 위기를 겪고 있던 1529년에 국왕을 통하여 대법관직에 임명되었습니다. 평신도로서는 처음으로 이 직위에 오른 토마스는 이 어려운 시기를 맞아 국왕과 국가에 봉사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힘 없는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기 이익만 챙기려 하는 사람들의 해악을 막고 정의를 증진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1532년, 영국 교회를 지배하려는 헨리 8세의 계획을 지지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대법관직을 사임하였습니다. 그는 공직 생활에서 물러나, 가족들과 함께 가난을 견디었으며, 시련의 때에 거짓 친구들임이 드러난 많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양심을 더럽히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그의 강직함과 단호함을 확인한 국왕은 1534년 그를 런던탑에 가두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온갖 심리적 압력을 받았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흔들리지 않았고 그에게 강요된 선서를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은 제어할 수 없는 전제 정치의 길을 여는 정치적, 교회적 타협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입니다. 재판정에서 그는 혼인의 불가해소성, 그리스도교 문명의 법률적 세습 자산에 대한 마땅한 존중, 국가와 맺는 관계에서 교회가 누려야 할 자유에 대한 신념을 열렬히 변호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몇 세기가 지나자 교회에 대한 차별이 줄어들었습니다. 1850년에는 영국 가톨릭 교계 제도가 재확립되었습니다. 이로써 많은 순교자들의 시성 추진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존 피셔 주교를 비롯하여 53명의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1886년에 교황 레오 13세 성하를 통하여 시복되었습니다. 또한 순교 400년이 되는 1935년에는 교황 비오 11세 성하를 통하여 존 피셔 주교와 함께 시성되었습니다.
4.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는 이유는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정치계와 행정계에서 느끼는 믿음직한 역할의 모범에 대한 필요성입니다. 힘든 도전과 중대한 책무가 늘어나는 역사적 시기에는 진리의 길을 가리킬 수 있는 본보기가 필요합니다. 오늘날은 실제로 매우 혁신적인 경제 세력이 사회 구조를 재형성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생물 공학 분야의 과학적 성취는 모든 단계의 인간 생명을 수호하여야 할 필요성을 분명히 나타내 줍니다. 반면, 혼란스러워하는 여론에 성공적으로 제시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은 가정과 젊은이들, 노인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명확한 정치적 결정을 절박하게 요구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 토마스 모어의 모범을 살펴본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바로 권력이 아니라 정의라는 숭고한 이상에 봉사하려는 의향을 가지고 합법적 권위와 제도에 변함 없이 충실하였던 것으로 유명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보다도 덕의 실천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러한 엄격한 도덕적 태도를 견지하였던 이 영국 정치인은 공직 활동을 통하여 사람들, 특히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공평성에 대한 뛰어난 감각으로 사회적 논쟁을 다루었으며, 가정을 옹호하고 수호하는 데에 힘을 다 바쳤고, 또한 젊은이들의 전인 교육을 지지하였습니다. 명예와 부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청렴하고 기꺼운 겸손, 인간의 본성과 성공의 무상함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 신앙에 뿌리박은 판단에 대한 확신, 이 모든 것은 그에게 역경과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그를 지탱해 준 확신에 찬 내적 힘을 주었습니다. 그의 성덕은 순교로 빛났지만,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헌신으로 일관된 전 생애에 걸쳐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에서, 그와 같이 신앙과 행동을 완전하게 조화시킨 예를 들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평신도들의 생활의 일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평신도들은 참으로 일상의 직업 생활과 사회 생활 안에서 성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소명에 응답하고자, 평신도들은 하느님께 일치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로 인도하는 기회로서 일상 생활을 인식하여야 합니다”(17항).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이 같은 조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위대한 영국 정치인의 인품을 특징짓는 요소일 것입니다. 그의 열정적인 공직 생활은 사형 집행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유머를 잃지 않는 소박한 겸손으로 일관되었습니다.
그는 진리에 대한 열정에 이끌려 이러한 높이에 이른 것입니다. 그의 양심을 밝혀 주었던 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정치도 도덕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의식이었습니다. 제가 이미 다른 기회에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에 인간의 권리는 하느님께 그 기원을 두며, 창조 계획을 바탕으로 하고, 구원 계획의 일부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권리는 하느님의 권리이기도 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1998년 4월 7일 연설).
토마스 모어의 모범이 밝게 빛을 발하였던 것은 바로 양심의 권리를 옹호할 때였습니다. 이단자들에 대한 행동에서 그가 비록 그 시대의 문화적 한계를 반영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도덕적 양심의 가치를 독특한 방식으로 입증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심은 하느님 자신의 증인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와 판단은 인간의 영혼 깊숙이 파고듭니다”(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 58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은 오늘날의 세계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합니다. 오늘날에는 “인간이 지닌 고귀한 존엄성에 대한 의식이 커지고 있다. 인간은 만물에 앞서고 또 인간의 권리와 의무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26항). 성 토마스 모어의 생애는 정치 윤리에 대한 근본 진리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국가의 부당한 간섭에서 교회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은 최고의 양심의 이름으로 정치 권력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모든 사회 질서의 기본 원리를 발견합니다.
5. 그러므로 저는 성 토마스 모어와 같이 특출한 인물을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는 것은 사회의 선익에 이바지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교 제삼천년기로 데려다 주는 대희년의 정신과 완전히 일치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에게 보내 주신 청원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기꺼이 받아들여, 성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들의 거룩한 수호 성인으로 정하여 선포하며, 법에 따라 이 범주의 수호 성인들에게 속하는 모든 전례적 영예와 특권을 그에게 부여하도록 명령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인간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성 베드로좌에서 |
[출처-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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