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대성당은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교회의 상징이다. 1784년 최초로 이곳 명례방에서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다. 그후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된 다음 블랑 백 주교가 종현의 땅을 부분적으로 매입하기 시작하고 인현서당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추진하면서 성당건립을 시도하였다. 그러던 중 성당의 위치 문제로 인해 정부 당국과의 분쟁이 일어나 성당 건립은 지연되었지만 신자 수는 계속 증가하여 1892년 약현(現 중림동)본당을 분리시켰다.약현본당의 분리와 함게 코스트 신부가 성당 설계에 착수하였고, 공사를 지휘하다가 1896년 선종했다. 그후 후임으로 부임한 프와넬 신부가 본당 사목을 맡아 성당 건축을 마무리 지었다.
1898년 5월 29일 축성식과 함께 한국 교회의 주보인 무염시태의 마리아께 성당을 봉헌했고, 1900년 용산 신학교로부터 병인박해 때 순교한 사람들의 유해를 받아 지하성당에 모셨다. 1925년 처음으로 한국인 사제 박일규 신부를 보좌신부로 맞아들였다.1927년 10월 17일 백동(혜화동)본당을 분리시켰으며, 194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기준 신부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그해 12월 20일 최초의 한국인 주교 노기남주교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1939년 2월 11일 문화관을 신축하여 축성식을 거행하였고, 1944년 샬트로 성 바오로 수녀회로부터 전교수녀 2명을 맞아들여 사목에 박차를 가하는 도중 1945년 광복을 맞아 성당명을 종현대성당에서 명동대성당으로 바꾸었다.1880년대 이래 '성서활판소'가 설치되었고, 『경향잡지』, 『경향신문』 등이 간행되어 한국교회의 출판문화를 선도하게 되었다. 1970년 2월 17일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를 구성하였고, 3얼부터는 토요 특전미사제를 도입하여 시행하였으며, 12월 25일 월간 『가톨릭 명동』을 창간하였다. 특히 명동대성당은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중심기지가 되어 한국사회의 발전과 인권신장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85년 명동 천주교 200년사 자료집으로 『서울교구연보』를 필두로 연차적으로 『명동교세 통계표』, 『명동대성당 건축사』, 『가톨릭 인권운동사』, 『뮈텔주교일기』등을 발간하였으며, 1991년 지하성당을 새롭게 단장하여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
서울 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은 명실공히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이다. 이곳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2천 년 교회사 안에서 유례 없이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창립됐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때로부터 치지만 그보다 4년이 앞선 1780년 1월 천진암에서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의 저명한 소장 학자들은 천주학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 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복판에 겨레 구원 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명동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훈, 정약전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됐으나 이 신앙 공동체는 이듬해 형조 금리(刑曹禁吏)에게 발각돼 김범우가 경상도 단장으로 유배되면서 해체됐다. 그 후 1882년 명동은 한미수호 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성당 터로 매입된다. 블랑 주교는 이 곳에다 우선 종현 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한불 수호 통상 조약(1886년)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깍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이 때 신자들은 손수 팔을 걷어 붙이고 정지 작업에 나섰는데 블랑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남자 교우들은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는데 그것도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일에 노랄 만한 열성을 쏟았고 그들은 신앙과 만족감에서 추위로 언 손을 녹일 정도로 참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의 열성으로 시작된 명동 대성당의 정지 작업은 풍수 지리설을 내세운 정부와의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4년이 지난 1892년 5월 8일에 가서야 기공식을 갖는다. 그 사이 초대 주임 블랑 주교가 1890년 선종하고 두세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는데 그는 약현(현 중림동) 성당과 용산 신학교의 설계 감독도 맡았다.
코스트 신부가 1896년 선종하고 그 뒤를 이은 프와넬 신부에 이르러서야 성당 건축을 마무리 짓고 드디어 1898년 5월 29일 성신 강림 대축일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기공 후 무려 12년만에 완공된 명동 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명동 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역에는 기해?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됐었다. 순교한지 약 20일 후 칠팔 명의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분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 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됐다가 1901년에 이곳으로 모셔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