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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袈裟)는 범어로 kasaya 또는 가사야(袈裟野)라고 한다. 가사는 수행승이 입는 법의(法衣)의 하나로 애초에는 사람이 내버린 옷, 죽은 사람의 옷을 백팔염주를 본 떠서 백팔장(百八張)을 모아 불규칙하게 꿰맨 것이었다. 청, 황, 적, 백, 흑의 오정색(五正色) 이외의 잡색으로만 물들여 쓰도록 규정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승복의 재료를 의체(衣體) 또는 의재(衣財)라고 한다. 여러 개의 천을 직사각형이 되게 붙여서 만든다. 네 귀에는 일(日), 월(月), 천(天), 왕(王)이라는 수를 놓고 양쪽에는 끈이 달려 있으며 겹으로 하여 사방에 통로를 내었는데 이것을 통문(通門)이라고 한다. 콩알을 넣어 사방으로 굴려서 통해야 하며 만일 막힌 곳이 있으면 다음 생에 맹인보(盲人報)를 받는다고 한다.
가사를 입을 때에는 장삼을 입은 다음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끈으로 매어 고정시킨다. 그 규격에는 오조(五條, 一長日短)로 만든 것을 안타회(安陀會)라고 하고, 칠조(七條, 二長一短)으로 만든 것을 울다나승(鬱多羅僧), 구조(九條)·십일조(十一條)십삼조(十三條, 모두 이장일단), 십오조·십칠조·십구조(삼장일단), 이십일조·이십삼조·이십오조(사장일단)를 승가리(僧伽梨)라 한다.
이 삼의(三衣)는 본래 부처님이 더운 지방에 사는 이를 위하여 만든 법의(法衣)로서 이것만으로 몸을 가리기 때문에 의(衣)라고 하였으나, 우리 나라,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추운 날씨 관계로 가사 아래 장삼을 입어 가사와 구별하였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가사를 만드는 재료가 풍부하고 다양해 짐으로써 다소 화려해 지는 등 법규에 어긋난 점도 없지 않았다.
신라의 법흥왕이 입었다는 피방포(被方袍) 역시 가사였는데, 그 후 승통(僧統)의 확립과 법계제도의 정착으로 승의제도(僧衣制度)도 확립되었고 승복도 화려해졌다. 불교를 국교로 했던 고려에서는 위로는 금란가사에서부터 아래로는 거사의 백저착의(白紵窄衣)까지 다양하였다고 한다. 백저착의는 원효대사가 속복으로 입었던 일과 차득공(車得公)이 시의(베옷)를 입었던 일과 같이 속복을 입은 거사들이 많았다.
고려시대의 승의제도를 살펴보면 국사(國師)와 율사(律師)는 장수편삼(長袖偏衫)을 입고 가사를 걸치고 자상(紫裳)을 하였고, 대덕(大德)은 단수편삼(短袖偏衫)에 황토색의 괘의를 입고 황상(黃裳)을 하였으며, 비구는 황토색 포의(布衣)나 자의(紫衣) 또는 납의(衲衣, 누비옷)을 입었고, 재가신도는 백저착의에 검은 비단의 허리띠를 둘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승복제도는 별 차이가 없었는데, 다만 세종때 금령(禁令)으로 회색옷을 입지 못하게 하여 삼베의 빛깔인 시색의 승복을 착용하도록 했다. 이것은 회색이 옥색에 가깝고 고려시대의 구색(鳩色)과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오늘날 다른 우리 고유의 의상들은 사라졌지만 승복만은 오랜 전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