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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오카 토쿠진-네이버캐스트

띨빡이 2009. 10. 7. 22:24

 

 

어떤 예술 혹은 창작 작업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디자인에 있어서도 남다른 개성은 중요하다. 뛰어난 개성은 디자이너 개인의 영광을 넘어서 기업이나 국가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경제적 부가가치가 되기도 한다. 세계 디자인계가 이미 오래 전부터 훌륭한 디자인의 덕목으로 디자이너의 개성을 맨 앞줄에 놓고 있음은 그래서일 것이다. 모든 디자인이 조금씩 다르지만, 특히나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디자인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디자인은 확연히 구별되는 느낌이다. 마치 디자이너의 얼굴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어떤 것은 화려하고, 어떤 것은 엄숙하고, 어떤 것은 산뜻하다. 그리고 요시오카 토쿠진(吉岡徳仁)의 디자인은 요새 유행하는 말을 빌려 요약하자면 ‘엣지’가 있다.

 

 

주로 패션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엣지있다’는 표현을 디자이너인 그에게 쓰는 일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이 산업 디자이너가 1988년부터 23년간, 이세이 미야케 밑에서 온갖 창조적인 일들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세이 미야케가 누구던가. 예술품에 가까운 옷을 만들어내기로 유명한, 가장 창조적인 패션 디자이너 중 한명이 아니던가. 이세이 미야케 특유의 패션쇼 디스플레이나 쇼에 등장했던 쇼킹한 소품들이 대부분 요시오카 토쿠진의 손을 거쳤고, 이런 과정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에도 자연스럽게 이세이 미야케의 영향이 배어나게 되었다. 이세이 미야케 시절에 그가 보여 주었던 디자인들은 대부분 설치미술을 방불케 하는 것으로, 예술과 디자인을 분리시켜 생각하려는 사람들을 머쓱하게 만들 만큼 아이디어와 철학으로 가득차있었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면서 요시오카 토쿠진은 이세이 미야케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 물론 이세이 미야케와의 작업도 계속했지만,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토요타나 닛산과 같은 글로벌 기업들과의 다양한 디스플레이 작업을 하면서부터다.

 

 

그의 디스플레이 디자인들은 모두 신비로운 시각 효과와 창조적인 시도들로 풍부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디스플레이 디자인으로 명성을 얻는 한편, 그는 다양한 가구들로 자신의 감각이 패션이나 순수 미술적 세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2001년도에 발표한 ‘허니 팝(Honey-pop)’ 의자와 2002년에 선보인 ‘도쿄 팝(Tokyo-pop)’ 의자가 바로 그 예이다.

 

 

허니 팝’ 의자는 독특하면서도 낯익은 디자인이다. 접으면 납작한 평면이 되고, 좌우로 늘리면 입체가 되는 이 벌집구조는 중국이나 우리나라,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주 활용되어온 것이다. 싸구려 장식 소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이런 구조를 요시오카 토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의자에 실현하여 지금까지 보아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자를 내놓은 것이다. 특수한 종이소재와 벌집구조가 가지는 견고함으로 인해 이 의자는 체중을 너끈히 버틸 수 있음과 동시에 내구성까지 좋아서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의자라면 단단하고 딱딱한 소재로만 만들 수 있다는 통념이, 이 종잇장처럼 가볍고 다루기 좋은 소재로 인해 보기 좋게 전복된 것이다. 소재를 다루는 기술의 은덕으로 보아도 좋을 의자이지만,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전통과 배경을 활용하는 태도. 이것은 그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 디자이너들의 특징으로 현대적인 재료나 삶, 작업을 다룸에 있어 서양 디자이너들에게선 찾기 힘든 색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 또 그것은 결과적으로 이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의 디자인과 차별화되는 일본적인 개성을 만들어내게 하였다.

 

‘미디어 스킨(Media Skin)’이라는 휴대폰 디자인은 요시오카 토쿠진이 일본의 산업 디자이너임을 확인시켜줌과 동시에 현실적이며, 기능적인 디자인에도 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끈하게 다듬어진 외형은 인테리어나 디스플레이, 가구 디자인 등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스타일과는 좀 달라 보인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엄격하게 통제되어있는 형태 위로 날카로운 긴장감과, 디자인의 표면을 뜨겁게 달구는 붉은 빛이 이 디자인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을 뿐이다.


 

2007년, 밀라노 가구 박람회의 모로소(Moroso)관 디스플레이는 물질적 단순함을 넘어서 정신적인 단순함의 경지에 이른 요시오카 토쿠진의 출중한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멀리서 보면 환상적인 이미지에 무언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투명한 빨대들 뿐이다. 어떤 첨단재료나 기술도 없다. 그런 점에서 이 디스플레이 디자인은 정신적으로 대단히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널려있는 이 수만 개의 빨대들을 통해 흡사 망망대해에서나 느낄 수 있는 그런 무한함, 절대적 숭고함에 직면하게 된다. 이 광경은 숭고함, 무한함을 기호(symbol)화하지 않고 그대로 코앞에 가져다 준다. 설치미술의 혐의를 아무도 제기하지 않는 것은 이런 생생한 감동 때문이다. 그의 디자인이 이렇게 겉모습의 남다름에서 멈추지 않고 감동으로 마무리 된다는 사실은 디자인에서도 완성도나 정신적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비록 표피적인 느낌만을 칭하는 표현이긴 하지만 요시오카 토쿠진 같은 일본 디자이너들에겐 ‘엣지’라는 말이 맞춤옷처럼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일본의 디자이너들은 대체로 무언가 윤곽이 딱 떨어지는, 각이 잡혀 보이는 디자인을 선호해왔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요시오카 토쿠진은 다양한 재료에 대한 실험이나 사물을 보는 파격적인 관점을 통해 모양보다는 정신적인 각(edge)를 잘 표현해온 디자이너라고 이해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