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지방마다 향교가 있지만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복원한 건물이다. 더구나 큼직한 자물쇠로 잠겨 있어 안을 구경하기조차 힘들다. 이에 반해 장수향교는 500여 년의 풍상을 겪으면서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향교 안의 건물로는 대성전(大成殿)을 비롯해 명륜당(明倫堂), 사마재, 진덕재, 경성재, 부강문(扶綱門) 등이 있다. 보물로 지정된 12칸짜리 대성전 건물은 구조가 특이해 역사적으로도 그 가치가 높이 인식되고 있다. 낮은 석축기단 위에 맞배지붕을 세운, 정면 3칸과 측면 4칸의 건축물로 좌우 측면 하단에 석벽을 쌓았다. 향교가 원형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에는 향교지기 정경손이라는 사람의 공이 컸다. 임진왜란 때 정경손은 일개 교지기의 신분이면서 향교를 떠나지 않았다. 왜적의 장수가 목을 겨누어 내리치려 했을 때도 조금의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없이 “여기는 성전이니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꼭 들어가려거든 나를 죽이고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정경손의 호담한 의기에 감복한 왜장은 “이 성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신표를 써주고 물러갔다. 정경손이 이 신표를 향교 정문에 걸어 놓으니 그 뒤에도 왜적들이 향교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향교 앞에 이 분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마지막 3절의 한 명인 순의리 백씨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천천면 장판리에 타루비(墮淚碑)가 세워져 있다. 장척 마을 옆 산기슭에 서 있는 이 비석은 자기가 모시던 현감이 비명횡사하자 “이는 주인을 잘못 모시어 죽게 한 것”이라며 주인을 따라 순사한 한 관노의 충정을 기리고 있다. 그는 손가락을 깨물어 절벽에다 꿩과 말의 그림을 그리고 바위에다 ‘타루’ 두 글자를 쓰고 현감이 빠졌던 소에 몸을 던졌다. 그림과 타루 글자는 1967년 도로개설 공사를 하면서 없어지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