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당시 젊은 만화가들을 중심으로 뭉친 만화가 모임이 바로 창작만화가회(창만회). 이후 낚시 모임이자 국내 최고(最古) 만화가 모임이 된 ‘심수회’의 전신이다. 야구모임을 빙자해(?) 만들어졌다는 창작만화가회엔 윤승운 씨도 있었는데, <따개비>의 오원석 선생과 <시인이로소이다>의 허어 선생이 합세해 종로5가에 조그마한 작업실을 내 공동작업을 했다고 한다. 1972년까지 약 5~6년 전문작가가 함께 활동하다 보니 일거리가 많이 늘었고, 이 시기 드디어 신문수 선생의 대표작인 <도깨비 감투>가 《어깨동무》에 60페이지짜리 단권 부록으로 실리기 시작하며 크게 흥행한다.
이 인기를 본 《소년중앙》의 의뢰로 연재를 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로봇 찌빠>. 이 작품 반응도 굉장히 좋았고, 당시 새로 생기기 시작하던 잡지들이 너도나도 의뢰를 해 오게 된다. 당시 《소년생활》 《소녀생활》 《보물섬》 등등 온 잡지들이 부록뿐 아니라 본지 연재만화로도 작품을 싣기 시작해 분량이 많아지게 된 것. 선생은 <도깨비 감투>와 <로봇 찌빠> 때도 혼자서 문하생 없이 두 부록 만화를 하기 위해 매일 밤을 새다시피 했었고, 급기야 새벽 2시에 끝나면 그 다음 것을 뒤져서 하기도 하면서, 저쪽 주인공이 이쪽에 있는 등 이름도 헷갈릴 지경이었다고. 이 때문에 선생은 훗날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그때 여러 군데 자리 잡으려다 보니 많이 한 것도 있었지만 조금 더 작품을 선택해서 조절해서 조금만 했었으면……. 다작을 하지 않았으면 그 당시 머리 팡팡 돌아갈 때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 거 같은데. 70년대 80년대 너무 많이 작품 연재를 많이 해서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한두 권 작품에 열중했으면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까 생각이 드는데.”
선생은 단행본 다작을 하는 후배 작가들에게 “극화체 만화가 손이 들긴 하지만, 그걸 넘어서 ‘닭장처럼 일사불란하게 공장처럼 차려놓고 하는’ 작업 방식이 당장 돈은 벌지 몰라도 작가 생명이 오래 못 간다”고 충고한다. 선생 자신도 한창 바쁠 때는 원고 갖다 주는 직원 하나는 있어도 실제로 자기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안 썼다고 한다. 이런 공장 시스템으로 돌아가던 당시, 신촌의 만화 출판사 쪽으로부터 윤승운 선생과 함께 이름만 빌려주면 책을 알아서 찍어내고 월 1천만씩 입금해 줄 테니 계약하자고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솔깃했던 건 사실이지만 안 하길 백 번 잘했다 생각한다고. “오랫동안 작가 생활을 하려면, 자기 작품을 자기가 관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