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

선암사

띨빡이 2009. 7. 29. 21:02

백제성왕 7년인(529)년에 선암사 비로암지에 아도화상(阿度和尙)께서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사찰명을 해천사(海川寺)라하고 산명을 청량산(淸凉山)이라 하였다 한다.
그 뒤 도선국사께서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선암사에는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해진다.
이후 선암사는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의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으며 또한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는 호남의 중심사찰 이었다.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그 때의 중창은 법당 13, 전각 12, 요사 26, 산암 19개소 등의 방대한 규모로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다만 김극기(1171-1197)의 시에 적막하고 고요한 수행의 사찰로 적고 있다. 조선전기의 선암사의 기록은 중종 35년(1540)년 일주문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때에 큰 피해를 입는데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철불, 보탑,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 후 선암사는 복구를 못하다가 1660년에 경준(敬俊), 경잠(敬岑), 문정(文正)의 세 대사에 의하여 대웅전을 세우는 등 8년간 괄목할 중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쟁이전의 상태를 복구하는데는 무리였다.
선암사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신 분은 호암약휴(護巖若休)스님이었다. 호암스님은 승선교를 비롯하여 원통전 불조전 등을 만들었다. 중창이후 법당 8, 전사(殿舍) 12, 중료(中寮) 16, 산암 13, 부속암자로 선적암(善積庵), 도선암(道詵庵) 등에 이르렀다고 한다.
영조 35년(1759) 봄에 선암사는 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상월새봉(霜月璽封)과 서악(西岳)이 다음해인 1760년에 재건 불사를 시작하였다. 이는 아도화상이래 도선-의천-경잠-경준-문정-호암의 뒤를 이은 오창(五創)이라 할 수 있다.
상월새봉 스님은 중창불사 뿐만 아니라 화엄대법회를 1734-35년 두 차례에 걸쳐서 각각 선암사에서 개최하였는데 이때 참가한 1287명의 명단이 선암사 해주록(海珠錄)에 전해진다. 그리고 상월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1761년 산 이름을 청량산 사찰 명을 해천사로 개칭하였다.

정조 13(1789)년에 정조가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스님이 대각암에서 100일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가 태어나자 순조는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 하였다.

순조 22년(1798)에는 승중문음(僧中文音)으로 유명한 해붕전령(海鵬展翎)이 칠전(七殿)을 중창하였다.   
순조 23년(1823) 3월 30일 실화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동의 건물이 불에 타자 다음해부터 해붕.눌암(訥庵).익종(益宗) 등이 제 6중창불사를 하여 현재의 가람의 규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산명과 사명을 다시 복칭(複稱)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함명태선(涵溟太先)-경붕익운(景鵬益運)-경운원기(擎雲元奇)-금봉기림(錦峯基林) 등의 4대 명 강백을 배출하였다.

1919년 본발사법에 의하여 전국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순천,여수,광주지역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현재의 선암사는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인 태고총림(太古叢林)의로서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종합수도 도량이다.  

 

 

 

 

통일신라
선암사에 처음으로 차를 보급한 분은 도선국사로 선암사 일주문 주변에 차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므로 선암사차의 역사는 통일신라 말로 선과함께 같이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인 대각국사는 칠구선원을 신축하고 현재 칠전선원차밭에 차를 심었고 여기서 수확한 차를 법제하여 송나라에 수출하였다고 전해진다.대각국사이후부터 임란이전까지 선암사차에 관련된 기록이나 구전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김극기의 시에서 정막하고 고요한 사찰로 기록하고 있어 선을 위주로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참선과 함께 차를 줄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유재란으로 선암사가 거의 소실되었을 때 차나무 또한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후 문정.문준.경준스님이 선암사의 복구를 시작하는데 이 때 차밭도 함께 복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조선시대 선암사의 기록에 차에 관한 기록으로는 상량문 등의 연화질에 다각이라는 소임이 등장하는데 이는 차밭과 차를 관리하는 소임자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일상 생활 속에서 차를 줄겨 마셨음을 알 수 있다.
해방과 함께 불교분규로 인하여 차밭을 거의 방치하다가, 70년대에 선암사재적승려의 노력과  승주군청의 도움으로 차밭을 손질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현재에는 전통차의 보급과 활성화를 위하여 100여명의 스님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도 하면 거창하게 한복입고 무릎을 꿇고 앉아 예를 갖추며 차를 마시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한국의 다도가 아니다. 일본의 다도가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차의 다성이라고 칭송하는 초의선사는《다신전》에서 “造時精 藏時燥 泡時潔 精, 燥, 潔 茶道盡矣”라 했는데 이는 만들 때 정성을 다하여 만들고, 보관할 때 건조한곳에서 보관하며, 마실 때 깨끗하게 마시면 이게 다도의 다함이라는 뜻이다. 선암사의 지허스님은 차는 누워서만 마시지 않으면 된다고 항상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는 다도라고 정해진 특별한 규칙은 없고 단지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편하게 마시
        면 되는 게 진정한 한국의 다도입니다.

 

 

 

                                                     [사이트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