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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고장 의성-네이버캐스트

띨빡이 2009. 7. 20. 14:57

태백의 힘찬 줄기와 낙동강이 감돌아 흐르는 의성은 옛 삼한시대부터 부족국가인 소문국(召文國)의 숨결이 서려 있다. 금성산(金城山) 정상에는 조문국이 성을 쌓고 싸웠다는 금성산성과 병마를 수련시킨 500여 평의 옛터가 지금도 있다. 신라, 고려, 조선 등을 거치면서 불교유적과 유교문화가 융합되며 찬란한 역사문화의 꽃을 피웠다.

하늘 배경으로 오롯이 선 기개

금성면 탑리로 향했다. 이곳은 신라 석탑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국보 제77호 오층석탑이 있다. 찾아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탑리에 들어서도 오층석탑 안내판 찾기가 힘들다. 천천히 차를 몰면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다. 이전 면사무소 자리라고 하지만, 막상 가보면 주차장도 없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중 울타리 철책으로 출입문이 잠겨 있었다는데 요즘은 열려 있다. 오층석탑은 화강암으로 된 석탑으로 부분적으로 전탑(塼塔)의 수법을 모방하고 있다. 높이는 9.56m, 기단의 폭은 4.51m경주 분황사의 석탑을 본뜬 것 같다. 기단은 단층 14석으로 된 지대석 24석의 면석으로 구성되었고,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 2개씩의 안기둥이 별석으로 되어 있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탑사기>에서 탑리 오층석탑에 대해 “그 자체로 하나의 조형의지와 미감을 갖추고 있다”며 “정림사 오층석탑을 방불케 하는 늘씬한 상승감과 튼실한 기단이 지닌 안정감이 살아나 있으며…(중략)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오롯하게 서 있는 기상이 당당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법당 위로 연꽃이 반쯤 피웠네

고운사(孤雲寺)를 찾았다. 의성읍에서 차로 20분 거리다. 주차장에서 산문(山門)을 들어서자 터널처럼 숲길이 펼쳐진다. 천년 숲길이다. 일주문까지 이르는 1㎞ 비포장 길은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산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속세의 잡념을 잊게 한다. 득도한 양 느릿느릿 천년의 시공을 넘듯이 걷는다.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처음 이름은 고운사(高雲寺). 신라말 최치원이 가운루(駕雲樓), 우화루(羽化樓)를 건립하니 그의 호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바뀌었다.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면 가운루가 눈에 들어온다. 길이 16m, 높이가 13m에 달하는 3쌍의 긴 기둥이 계곡바닥에서 거대한 루를 떠받치고 있다.

 

대웅보전은 최근 중창불사로 단청의 색도 곱고 웅장하다. 상대적으로 예스러움은 없다. 대신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牒)을 봉안한 연수전(延壽殿)이 눅눅한 세월의 티를 팍팍 낸다. 만세문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에 사방 담을 쌓은 가구식 기단에 겹처마 형식의 팔작지붕이다. 사찰의 여타 전각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숭유억불시대에 사찰 내에 왕실과 관련된 건물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약사전 안에는 보물 제246호인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다. 높이 79㎝의 불상으로 대좌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다. 4각형 얼굴에 인중이 뚜렷하고, 작은 입은 굳게 다물고 있다. 고운사에서 반드시 봐야 할 볼거리가 있다. 종무소 뒤 만덕당 기둥 옆에 걸터앉아 등운산을 바라보면 둥그런 바가지를 거꾸로 얹어 놓은 듯한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을 볼 수 있다. 친절하게 기둥에 ‘이곳에 앉아서 등운산을 바라보세요’라는 안내문이 쓰여 있다. 마루에 걸터앉으면 사각형의 하늘 그림이 눈 안에 들어온다. 새파란 도화지에 누군가 하얀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다. 등운산은 가늘고 길게 자란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바라만 봐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빙혈

빙계계곡은 경북팔승(慶北八勝)의 하나로 꼽힐 만큼 주위 경관이 빼어나다. 계곡도 크고 깊어 갈지자()로 몇 굽이의 곡류를 이루며 흐른다.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은 이곳을 돌아보고 “굽이치는 개울물에 물고기가 헤엄치고 떨어질 듯 매달린 바위틈에 꽃이 드리워졌구나”라고 했다. 여기에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언급되어 있는 빙혈(氷穴)풍혈(風穴)이 있어서 일찍부터 명승지로 이름을 얻었다.

 

계곡 한쪽 언덕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쪽 구멍인 빙혈은 한여름에 얼음이 얼고 겨울에는 평균 영상 3도의 훈훈한 기운이 감돈다. 위쪽 구멍인 풍혈은 여름철에는 찬바람이 나오고 겨울철엔 더운 바람이 나온다. 계절을 잊은 자연의 오묘한 신비다. 이 빙혈과 풍혈 곁 평평한 곳에 빙산사지 오층석탑이 서 있다. 1958년 국보로 지정됐다가 1963년 국보 재사정 때 제외되어 현재는 보물 제327호로 지정됐다. 오층석탑 옆에는 인암(人岩)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한낮 햇빛이 바위 전면에 강하게 내리 쬐면 ‘인()’자 모양의 그림자가 보인다고 한다.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개울 가운데 유난히 커 보이는 바위에 ‘빙계동(氷溪洞)’이라 새겨져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이곳을 지나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썼다는 전설이 있다. 그 옆에 놓인 큰 바위 위에는 경북팔승지일(慶北八勝之一)이라고 새긴 아담한 돌비가 자리 잡고 있다. 계곡 위 불정봉 꼭대기에 움푹 파인 데가 있는데, 주민들은 이를 불정(佛頂)이라고 부른다. 옛날 부처와 용이 서로 물길을 내기 위해 다툴 때 부처가 찍은 쇠스랑 자국이라고 한다. 또 근처 개울가에 길이 수십 미터의 웅덩이가 있는데 부처와 다툰 용의 머리가 부딪혀 파인 곳이란 전설이 있다. 지금은 오랫동안 개울물이 흐르지 않아 거의 없어졌지만 여기를 용추(龍湫)라 한다.

 

 

낮은 언덕 등지고 기품있게 자리잡은 반촌(班村)

의성읍에서 고운사를 향해 가다 보면 사촌(沙村)마을을 지나게 된다. 퇴색한 고가(古家)와 재실(齋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조선시대 정경을 연상케 한다. 1392년 감목공(監牧公) 김자첨이 안동에서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부자보다는 학자들이 많이 태어날 명당이라는 풍수지리설에 걸맞게 송은 김광수, 만취당 김사원, 천사 김종덕 등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들뿐만 아니라 대과에 13, 소과에 35명이 합격하는 등 문집과 저서를 낸 분들이 60여 명에 이른다.

 

사촌마을 서쪽에는 길게 가로 놓인 숲이 있다. 사촌 가로숲으로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성했다.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수령이 400600년 된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이 빼곡하다. 나무의 높이는 2030m이며 길이도 800m에 이른다. 서애 류성룡의 어머니가 1542년 사촌리 친정집에 다니러 왔다가 이 숲에서 류성룡을 낳았다는 전설이 있다. 금성면에도 40여 동의 전통 고가옥이 유존되는 양반촌인 산운마을이 있다. 자연경관이 수려한 영천 이씨 집성촌으로 마을은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금성산을 뒤에, 비봉산을 옆에 두고 나지막한 구릉과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이름은 신라시대 불교가 융성할 때에 수정계곡 아래 산과 구름이 조화를 이룬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 산운(山雲)이라 하였다는 데서 비롯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