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길, 큰스님에게 듣는다-통도사 방장 원명스님
<사진> 짧은 만남이지만 스님에게서는 무욕의 삶이 느껴졌다. 경봉스님을 모시고 극락암에서 지냈던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스님의 표정은 조금씩 밝아졌다.
“욕심 버리면 이루지 못할 일 없어”
60여 년 동안 산문 지킨 ‘어른 스님’
‘도’가 도대체 무엇이고 ‘깨달음’은 또한 무엇인가. 지난 한 해 동안 친견한 원로 스님들에게 느낀 것은 예상외였다. 거창하고 어려운 답변도 있었지만 쉽게 표현하면 ‘특별히 정해진 길이 있겠는가? 전통과 정통을 벗어나지 않는 수행 중 어느 하나에 정통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였다. 요즘말로는 전문가를 의미하는 ‘달인’일수도 있다. 기축(己丑)년 새해를 9일 앞둔 지난 해 12월23일 궁금증을 풀기 위해 60여년 수행문에 들어있는 통도사 방장 원명스님을 만났다.
원명스님은 종단의 제15교구본사인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方丈)이다. 총림은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을 갖춘 종합대학과 같은 수행도량으로 방장은 총림의 최고 어른이자 산중의 법을 상징한다. 국내 5대 총림의 하나인 영축총림 통도사는 부처님진신사리(佛寶)를 모시고 있는 불지종찰(佛之宗刹)이요, 국지대찰(國之大刹)로 불린다.
스님은 2007년 4월 월하스님에 이어 통도사 3대 방장으로 취임했다.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후 30여 년 간 극락선원에서 수행하며 은사를 시봉한 것을 포함 60여 년 동안 영축산을 지켜왔다. 통도사 주지를 맡고 있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스님은 좀처럼 언론을 상대하지 않는다. 방장 추대가 확정됐을 때도 취임이후에도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운 좋게 스님을 만난 기자들도 10여 분만에 본의 아니게 물러나곤 했다.
“방장된 후에 기자 11명이 찾아왔는데 내가 고함을 쳤어. 부모형제 다 버리고 공부하는 스님들을 속세 사람들이 알아야 될 이유가 뭔가? 시대흐름에 맞춰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작년에 산중스님들이 ‘산중에 어른이 없다’며 집 지키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방장으로) 살고 있는데 할 말이 뭐가 있겠나. 기왕에 왔으니 주지스님에게 통도사에 대한 모든 것을 듣고 가시오.”
젊어서 스승을 극진히 모신 원명스님은 산중어른이 돼서는 상좌들 공부를 챙기느라 자신을 버렸다. 방장으로 오기 전 비로암에서는 새벽종성을 직접 챙기며 예불을 올렸다. 상좌들을 모두 공부하러 보내고 혼자 암자에 남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상좌들이 나서려 해도 ‘너거들 내 시봉 할라고 중 됐나. 니 공부하러 가라’며 떠밀곤 했다.
“소의 우직함 성실함을 본 받으세요”
“맡은 소임에 충실하며 화합하면
가정도 국가도 결국 잘 살게 될 것”
‘수행의 길’을 듣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던 일인가? 회의(懷疑)가 들 무렵 스님은 본지 기획연재물 ‘염화실 법향’에서 같이 원로의원이 된 한 스님과 그 은사와의 이야기를 감명 깊게 봤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철저히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스님에게는 은사 이야기가 ‘고리’가 됐다. “평소 (경봉)노스님이 들려주시던 가르침이 그립지 않느냐”는 주지 정우스님 지원에 다시 말문이 열렸다. 경봉스님이 극락암에 ‘부처님부터 33조사’를 모시고 매년 제를 올리며 출ㆍ재가를 막론하고 찾아오던 사람들과 나누던 법담이었다. 하지만 방장이 된 후에도 원명스님은 제를 올리고 법문을 기다리는 대중에게 “조사스님들 앞에서 공양 올렸으면 그것으로 다 됐지 더 이야기 할 게 있나”며 말을 줄였다. 그러면서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느냐’고 화두를 건네던 은사스님 이야기를 대신 꺼냈다고 한다.
“일생을 공부해서 한 소식하지 못하면 답을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오랫동안 스님을 모시고 있었지만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을 한 번도 못 봤어요. 염불을 하던 참선을 하던 한 경계를 얻지 못하면 답변을 할 수가 없어.”
스님은 “경봉스님이 10여 년 간 매월 첫 일요일 법회를 열어 적게는 600명 많게는 1000여명이 될 정도로 불법을 널리 펼쳤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전생의 업으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어려운데 우리는 운 좋게 사람으로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재산 때문에 부모형제가 원수가 되는 세상 아닙니까? 그게 다 욕심 때문입니다. 어떻게든지 욕심을 버리고 화합해서 살면 부모형제도 다 잘 되고 국가와 민족도 잘 살 수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외우더라도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해서 도를 얻지 못하면 특별한 그게 없습니다. ‘욕심부터 버리고 살면 된다’ 나는 그런 생각을 갖고 나는 살고 있습니다.”
새해는 기축(己丑)년 소 띠 해. 은사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는지 스님은 한 번 더 마음을 열었다.
“소는 태어나서 평생 주인을 위해 일해 주고 나중에는 몸까지 중생들에게 바칩니다. 살 뿐만 아니라 뼈까지 중생들이 고아 먹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소는 자기 몸 전체를 보시한 거야.”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경제도 어려운 만큼 근검절약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라는 당부. “마지막에 가서는 중생들을 위해 자기 몸까지 내어주는 소처럼 우리도 그렇게 회향할 수 있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씀으로 생각된다”는 정우스님의 화답에 스님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 ‘世界一花(세계일화)’ 붓글씨 한 점을 건네며 기자를 배웅했다.
“상좌, 은사, 다시 방장이 돼서도 초발심 때와 다르지 않다. 새벽예불하고 사시(巳時)에는 꼭 대웅전으로 오시고 대중들을 제접한다”는 원명스님.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가정살림도 나라살림도 다 잘 될 것”이라는 말씀이 막바지에 이른 통도사 화엄산림법회에 또 하나의 법문으로 다가 오는 듯 했다. 총림도 세계도 한 송이 꽃이다.
<사진> 좀처럼 언론을 접하지 않는 스님이 평소 즐겨 쓰는 글귀중 하나다. 세계(世界)는 한 송이 꽃이라는 의미. 스님은 “세계일화(世界一花)는 중생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설명을 붙여 본지 신년특집 선물로 건넸다.
원명스님은…
30여년 경봉스님 시봉…영축총림 화합 ‘상징’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2년 통도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9년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1년 통도사 강원 대교과를 마쳤으며 1955년부터 극락선원에서 28안거를 성만했다.
원명(圓明)은 법호, 법명은 지종(智宗). 1982년 은사 경봉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30여 년 간 곁을 지킨 맏상좌로 극락암의 명정스님과 초대 교육원장을 역임한 백련암의 원산스님이 사제들이다. 통도사 재무국장을 거쳐 1985~1988년 통도사 주지와 원효학원 이사 등 산중 소임과 제9대 중앙종회의원 등을 맡은 바 있지만 공식 회의와 군복무 등을 제외하고는 영축산문을 나서지 않고 60여년을 올곧게 수행문을 지켰다.
불보(佛寶) 종찰 통도사는 1967년 해인사 해인총림, 1969년 송광사 조계총림에 이어 1984년 총림으로 승격됐다. 2년 뒤 1986년 총림으로 정식 지정된 후 가장 안정된 총림으로 명성이 높았으나 1998년 종단사태 여파로 총림이 해제됐다 다시 지정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초대 방장 월하스님 입적 후에도 후임 방장을 모시지 못하는 3년여의 공백이 있었지만 월하스님의 손상좌인 정우스님의 주지 취임과 경봉스님의 맏상좌인 원명스님의 방장 취임으로 안정을 회복했다.
금강계단 개방에 이은 53일간의 화엄산림법회와 일요법회, 어린이법회 운영, 소나무 숲 정리 등 안정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추진력에 힘입어 도량이 정비되면서 구하-경봉스님 당시의 법향과 솔향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오래전 월하스님의 은사 구하스님과 원명스님 은사 경봉스님은 사형사제로 남달리 가깝게 지냈다. 두 스님은 ‘통도사’라는 선시를 함께 지어 불보종찰의 화합과 영원함을 기원한 바 있다. 방장실인 정변전에서 방장 원명스님과 마주하고 앉아 있다 보면 사리탑 앞에서 나란히 앉아 다정하게 앉아있는 구하-경봉 두 스님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寒山拾得/ 한산과 습득
呵呵笑/ 두 스님이 껄껄 웃는 것을
誰能識/ 누가 능히 알겠는가.
영축총림 통도사를 방문한 이는 누구나 원명스님의 소리 없는 법문을 들을 수 있다.
통도사=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490호/ 1월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