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군수 조병갑이 보의 수축을 빙자하여, 물세를 강제 징수해 동학혁명 유발의 원인이 된 만석보터로 향했다. 백산에서 신태인 쪽으로 가다가 이평으로 향하면 뚝 위로 비석이 보이는데 여기가 만석보터이다. 지금 이곳에 보 흔적은 오래 전에 사라졌고 만석보유지비와 비문만이 배들평야를 내려다보며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듯한 지평선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넓어 호남 최대의 곡창지대임을 자랑하던 배들평야의 논과 밭에는 더 이상 보리를 심지 않는다. 주민들은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유채꽃을 심었고, 봄이면 ‘유채꽃 축제’를 벌인다.
조병갑의 학정과 수탈에 불만이 팽배해 있던 농민 500여명이 1894년 1월 10일 봉기했던 말목장터도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이평면 면사무소 맞은편에 전봉준장군이 집결한 농민들에게 일장연설을 하고 기대어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아름드리 감나무는 2003년 여름 태풍 ‘매미’에 의해 넘어지면서 고사돼 방부 처리한 다음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보관 중이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 다른 의견도 있다. 유태길 향토사학자는 “지금은 자리를 5m 정도 옮겼지만 이전에 말목정이라는 정자를 감나무 옆에 짓고 콘크리트와 자갈을 깔아 뿌리를 상하게 했다”면서 “이 때문에 감나무의 뿌리가 허약해졌고 태풍에 그만 고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곳에는 현재 대체 감나무를 식재했다.
말목장터에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의 전봉준장군 고택까지는 차로 10여분 거리다. 본래 방, 부엌, 건넌방이 붙어 있는 초라한 초가삼간과 초가 흙담으로 둘러진 마당 한쪽에 헛간이 딸려 있는 옴폭한 옛집이었다. 1974년 해체 수리 당시 상량문(上梁文)에 ‘무인(戊寅) 2월 26일’이라는 적혀 있어 세워진 연대가 밝혀졌다. 지금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부엌, 큰방, 윗방, 끝 방에 다가 뒤뜰에 널찍한 잔디정원이 생겼다. |